북유럽신화, 오딘, 군로드, 브라기
#. 오딘, 시예의 봉밀주를 얻다
동굴 안으로 들어온 오딘은 숨어서 가만히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시예의 봉밀주를 지키고 있는 '군로드(Gunnloð:싸움거품)'를 발견했다. 오딘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젊고, 멋진 남자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흔히 작업 들어갔다고 하... 응?)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군로드는 호기심에 이끌려 노랫소리를 따라갔다. 동굴 바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는 멋진 남자가 보였다. 군로드는 갑자기 등장한 이 낯선 사내에게 깜짝 놀랐지만, 왠일인지 경계는 커녕, 적대감이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온 몸에서 힘이 풀리고, 숨이 막혀올 정도로 설렜다. 군로드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오딘의 곁에 앉았다. 잠시후, 흥얼거림이 끝난 오딘이 곁에 앉은 군로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녀의 눈을 보던 오딘은 군로드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고, 군로드는 격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사실 오딘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군로드에게 사랑에 빠지는 마법을 걸었다. 굳이 마법이 아니라하더라도 오딘은 군로드가 빠져들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오딘과 군로드는 그대로 사랑을 나누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군로드는 오딘의 품안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오딘의 품에 안겨 그가 불러주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따스함과 안정감을 얻었다. 사랑에 빠진 군로드에게 아버지인 수퉁의 명령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낯선 사내 뿐이었다. 오딘이 약하게 기침을 하자, 군로드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크흠.. 음. 괜찮아. 목이 좀 컬컬해서 말이야. 뭐라도 마실게 있으면 좋을텐데. 한 두모금이면 될 것 같아."
그때 군로드의 머릿 속에 떠오른게 있었다.
"아! 맞다. 그걸 마시면 되겠네. 아버지가 맡겨 놓은 술이 좀 있거든요. 그거라도 마셔볼래요?"
"응."
군로드는 오딘의 손을 잡고, 시예의 봉밀주를 숨겨둔 방으로 데려갔다. 시예의 봉밀주는 두 개의 항아리와 하나의 솥에 담겨 있었다.(두 개의 항아리는 '손(Son)', '보든(Boðn)', 하나의 솥은 '오드레리르(Oðrerir)'라고 하기도 한다.) 군로드가 항아리 하나를 들어 오딘에게 내밀었다.
"그럼 한 모금만 마실게."
라고 했지만, 오딘은 한 모금만으로 항아리에 들어있는 술을 다 마셔버렸다. 군로드는 오딘으로 부터 빈 항아리를 받아들게 되었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은 두 통이나 남아있으니까. 오딘은 목을 가다듬은 뒤, 군로드를 품에 안은 채 침실로 돌아갔다. 그렇게 봉밀주보다도 더 달콤한 하룻밤을 더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을 때, 오딘은 또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군로드는 다시 오딘을 시예의 봉밀주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고, 두번째 항아리를 건네주었다. 오딘은 이번에도 한 모금으로 항아리의 술을 다 마셔버렸다. 이번에도 군로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술은 한 통이나 남아있으니까. 오딘은 다시금 군로드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전보다도 더욱 뜨겁고 달콤하게 사랑해주었다. 그 다음날이 되자, 오딘은 다시금 목이 마르다고 말했다. 군로드는 이번에도 오딘을 시예의 봉밀주가 있는 방으로 데려가 마지막 솥을 오딘에게 주었다.
'어차피 술인데 뭐. 나중에 내가 더 맛있게 담궈드리면 되지.'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군로드에겐 오딘 만이 세상의 전부였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을 받는 것만이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온 동굴을 울리면서 어디선가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거 뭐야! 어떤 놈이 여기에 구멍을 뚫은거야!!!"
동굴 근처를 순찰 중이던 수퉁이 그제서야 동굴 뒷 편에 생긴 구멍을 발견하고 있는대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군로드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알아버린 것이었다. 수퉁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군로드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시예의 봉밀주는 이 남자(오딘)이 모두 마셔버린 뒤였고, 거기다 자신과 이렇게 밀회를 즐기고 있는 것까지 보게 된다면 이 남자는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죽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칫 생명은 물론 그의 시체조차도 동서남북 그 어디에서도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군로드는 황급이 오딘의 손을 이끌고 침실로 데려갔다. 군로드가 사색이 된 채, 자신의 날개옷을 꺼내 황급히 오딘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이걸 입어요! 빨리요! 우리 아버지는 화가 나면 아무도 못말려요. 당신을 보면 죽이고 말꺼예요. 이 옷을 입으면 독수리로 변할 수 있어요. 빨리 도망가요!"
오딘은 날개옷의 앞섶을 채워주는 군로드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어서 가요. 내 사랑."
오딘은 군로드에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곧바로 동굴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군로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잘가요, 내 사랑! 나를 잊지 말아요!"
수퉁은 화가 나 거친 숨을 내뿜으며 동굴의 문을 열어젖혔다. 동굴 문이 열리자마자 동굴 안에서 독수리 한마리가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수퉁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더니, 그도 이내 커다란 독수리로 변해 앞서 날아가는 독수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더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오딘은 전력을 다해 아스가르드를 향해 날았지만, 그 뒤를 쫓는 수퉁의 날개짓도 더없이 맹렬했다.수퉁이 따라잡을라치면, 오딘은 급강하, 급선회를 하며 수퉁의 부리와 발톱을 피했다. 요툰헤임은 진작에 멀어졌고, 미드가르드로 넘어 온 지도 한참이 되었다. 온 하늘에 수퉁이 내지르는 외침소리가 울려퍼졌다. 앞서 날아가는 오딘의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수퉁이 아랫쪽에서 오딘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속도라면 따라잡힐 것 같았다. 오딘은 황급히 수퉁의 머리를 향해 오줌을 뿌렸다. 오줌은 그대로 수퉁의 두 눈으로 들어갔다.
"에잇! 더럽게!!"
수퉁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사이 오딘은 더욱 힘을 내 아스가르드로 날아갔다. 눈에 들어간 오줌을 털어낸 수퉁이 다시금 오딘을 잡으려고 속도를 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자리를 맴맴 돌기 시작했다. 오딘을 뒤쫓으려던 수퉁의 눈에 저 멀리 아스가르드가 보였다.
'아.. 저긴 빌어먹을 신들의 땅이쟎아! 제길!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수퉁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신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봉밀주도 가져가고, 자신의 딸도 더럽혔음을. 하지만 그 시작은 자신이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 아니던가. 수퉁은 분한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며, 텅빈 하늘을 맴맴 돌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 즈음이 되서야 수퉁은 힘없이 요툰헤임으로 날아갔다.
한편, 아스가르드로 무사히 돌아온 오딘은 커다란 통에 자신이 마신 시예의 봉밀주를 다시 뱉었다. 이번 일로 오딘은 시예의 재능은 물론 더 많은 지식을 얻었다. 이후, 오딘은 생각이 날 때면 시예의 봉밀주를 꺼내 천천히 음미했다. 시예의 봉밀주는 그렇게 오딘의 술이 되었다. 가끔 아주 귀한 손님이 오거나, 기분이 좋을 때 다른 신들에게 조금씩 맛보여주기도 했지만.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딘으로 부터 이 시예의 봉밀주를 조금이라도 얻어마신 사람은 시와 글에 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런 자들이 [에다]처럼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 '스칼드(Skald : 북유럽지역의 음유시인)'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앞서 오딘이 수퉁에게 흘린 오줌 중 일부가 지상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받아먹은 자들은 형편없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왠지 뜨끔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군로드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후에 이 아이는 아스가르드로 보내졌고, 오딘의 아들로서 자라 아사 신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바로 '시의 신'이자, '시의 현자'인 '브라기(Bragi: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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