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신화, 리그, 신분, 계급, 쓰랄
#.스노리의 서가
오늘도 스노리의 서가에서 놀던 스튤라는 바닥에서 양피지 한 장을 발견했다. 다른 자료들과 달리 이것만 문가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자료를 옮기던 중 떨어진 모양이었다.
스튤라 : 아저씨. 여기 혼자 돌아다니는 애가 있어요.
스노리 : 뭐라고 적혀있니?
스튤라 : 어디보자... 으흠.. 쿤? 콘? 아님 옥수수?(그 시절엔 유럽에 옥수수가 없었지만.^^;;;)
여튼 그거에게 까마귀가 말을 걸고 있어요. 그 뒷부분은 없구요.
스노리 : 아~그럼 그거 같구나. 리그의 노래. 마지막 장이 어디갔나 싶었는데 거기 있었구나.
스튤라 : 에? 이게 마지막 장이에요? 쓰다 만것 같은데요?
스노리 : 하하. 그게 원래 그렇단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라 그런지 그 뒷 이야기는 사라져버렸단다.
스튤라 : 무슨 이야긴데요?
스노리 :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 신분(또는 계급)이 생기게 된 이야기지. 한번 들어보겠니?
스튤라 : 네! 들려주세요.
#. 미드가르드를 걷는 나그네
오늘도 태양의 마차는 다그르의 망토를 이끌며 늑대를 피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뒤로 달의 마차가 나드의 기운을 머금고 달려왔다.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은 어느덧 겨울을 지나 봄이 멀지 않음을 알렸다. 황폐해졌던 미드가르드의 대지에도 다가오는 봄을 향한 작은 희망이 꿈틀거렸다. 굴베이그의 재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인간들도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미드가르드는 다시금 희망을 품으며 초록빛 대지로 변할 날을 기다렸다.
나그네는 긴다리로 파도소리가 들리는 바닷가를 지나 아직 황폐함이 남아있는 들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그네의 뒤로 늦겨울의 찬바람이 불었다. 나그네는 바람에 날려갈까, 챙이 넓은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 나그네는 아주 허름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나무를 얼기설기 대충 엮어만든 이 작은 집의 허술한 나무벽 틈으로 작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나뭇가지를 이어만든 부실한 문은 열려있었는데, 나그네는 문 앞으로 다가가 주인을 불렀다. 이 낡고 허름한 오두막에는 '아이(Ai : 증조할아버지)'와 '에다(Edda : 증조할머니)'라는 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나그네를 맞이한 것은 아내인 에다였다. 에다는 굽은 허리를 간신히 피며 이 키가 큰 나그네를 올려다보았다.
"댁은 뉘슈?"
"어르신, 전 '리그(rigr : 나이 많고, 현명한. 또는 강한)'라고 합니다. 날이 저물고 추워서 그런데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나그네가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매우 예의바르고 선해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에다는 이 예의바른 청년이 안쓰러웠다. 에다는 청년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리그는 허리를 굽힌 채로 걸어야했다. 두 노인에겐 적당했는지 몰라도 집은 매우 좁았다. 한 쪽에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곁에 남편인 아이가 앉아있었다. 에다가 말했다.
"이 총각이 문 앞에서 덜덜 떨고 섰지 뭐유. 불쌍하게스리..."
"아이고.. 저런.. 어여 이리오시게. 여와서 불이라도 좀 쬐."
아이가 손짓을 하며 리그를 불렀다. 리그는 모닥불 앞으로 갔다. 모닥불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세사람은 불가에 다닥다닥 붙어앉을 수 밖에 없었다. 리그는 슬쩍 집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바닥은 흙바닥이었고, 낡은 나무벽 사이로 한기가 들어왔다. 안쪽 어둑어둑한 곳에 건초를 깔아만든 침실이 어렴풋이 보였다. 리그는 다시 시선을 모닥불 쪽으로 가져갔다. 모닥불 위로 낡은 냄비가 보였다. 순간 리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가 말했다.
"저런. 이 총각이 배가 고픈가보네 그려. 임자, 뭐 먹을꺼 없나?"
"남은게 있을까 모르겠네요."
에다가 굽은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일어났다. 에다는 부뚜막을 뒤져 딱딱한 빵 한덩이를 들고 나왔다. 에다는 힘겹게 빵을 자른 다음, 모닥불 위 냄비에서 묽은 죽을 떠 식탁을 차렸다.
"아이고.. 어르신. 이렇게 신세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녀. 괜차녀. 근데 내놓을께 이런거 밖에 없어 어쩐데. 늙은이들만 살다보니 뭐 먹을게 변변치않어."
두 노인이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리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유~ 아닙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먹을 수 있다는게 어딘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리그는 환하게 웃으며 딱딱한 빵을 집었다. 그런 다음 빵을 묽은 죽에 넣어 불려먹었다. 부실한 밥상이었지만 리그는 감사해하며 먹었다. 그런 리그를 보며 두 노인 내외도 함께 저녁을 나누어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세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건초더미로 만든 침실은 세사람이 눕기엔 작았지만 그래도 몸을 뉘어 잘 수 있는 곳은 그곳 뿐이었다. 리그는 두 노인을 양옆에 두고, 그 사이에 누웠다. 리그의 발이 건초더미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이가 리그의 발을 보며 말했다.
"아이고.. 총각 좁지? 우덜끼리 누울땐 괜찮았는데 총각에겐 좁을거 같어."
"아니예요. 괜찮습니다. 포근해서 좋은걸요."
그러자 이번엔 에다가 물었다.
"이런 노친네들하고 자려니 냄새나 나지 않을까 몰러."
"아이고, 아닙니다. 어르신. 전 할머니 품같아서 따뜻하고 좋은걸요."
리그는 두 노인사이에서 잠을 잤고, 그렇게 사흘을 머물렀다. 사흘이 지난 아침 리그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 사이 정이 듬뿍 든 두 노인 내외가 길어귀까지 나와 리그를 배웅했다. 에다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리그, 몸 조심혀야혀. 밥도 잘 챙겨묵고. 응?"
"네, 어르신. 어르신들도 몸 건강히 잘 지내셔야해요."
리그가 두 노인내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대답했다. 리그는 두 노인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은 뒤 길을 나섰다. 두 노인은 리그가 저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리그가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아이가 에다의 등을 토닥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리그가 떠난 지, 몇 달 후. 두 노인 내외에게 뜻 밖의 일이 생겼다. 에다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에다가 아이를 가진 것이다. 불러오는 배를 보며 에다는 당황했다.
"아이고.. 남새스러워라..."
당황하기는 남편인 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외로운 자신들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는 에다를 토닥였고, 에다도 남편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에다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내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쭈글쭈글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에다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아이와 에다는 아이를 씻기고 강보에 감싼 뒤, '쓰랄(Thrall, Thræl : 머슴. 게임 워크래프트 시리즈에 나오는 쓰랄과 이름이 같다. 동명이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쓰랄은 두 노인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쓰랄은 거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덩치가 매우 컸으며, 힘도 아주 장사였다. 어떤 짐을 꾸려서 지더라도, 힘들어하는 법이 없었고, 건초로 띠를 만드는 일에도 매우 뛰어났다. 숲에서 나무를 베어오는 일도 잘해서, 한 번에 남들의 몇 배가 되는 땔감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자가 쓰랄을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틸(Thir : 뜻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힘 또는 억척스러운 으로 여겨지기도 함)'이었다. 그녀는 쓰랄 못지 않게 덩치가 컸고, 코는 납작했으며, 햇볕에 탄 피부도 쓰랄 못지 않게 까무잡잡했다. 쓰랄은 틸에게 한 눈에 반했고, 틸도 그런 쓰랄에게 애정을 느꼈다. 쓰랄은 틸과 결혼했고, 수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아들로는 '흐레임르(Hreimr)'와 '피오스니르(Fiosnir)', '클루르(Klur)'와 '클렉기(Kleggi)', '케프시르(Kefsir)', '풀니르(Fulnir)', '드럼브(Drumb)', '디그랄디(Digraldi)', '드롯트(Drott)'와 '호스비르(Hosvir)', '루트(Lut)'와 '렉기알디(Leggialdi)'를 낳았다. 아들들은 아버지인 쓰랄을 따라 담장을 세우고, 농사를 짓고, 소와 돼지를 치고, 염소를 키웠다.
딸로는 '드룸바(Drumba)'와 '쿰바( Kumba)', '옥크빈칼파(Okkvinkalfa)'와 '아린네피아(Arinnefia)', '이시아(Ysia)'와 '암밧트(Ambatt)', '에이킨티아스나(Eikintiasna)'와 '토트룩히피아(Totrughypia)', 그리고 '트로누베이나(ronubeina)'를 낳았다. 딸들은 어머니인 틸을 따라 물을 긷고, 밭에서 일하고,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쓰랄과 틸로부터 [농노(혹은 노예)] 신분(계급)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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