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르의 두통과 무녀 그로아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토르는 모든 이들의 정성 어린 치료와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토르의 두 아내는 남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토르의 두 아이도 곁을 지키며,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했다. 이런 바람에 힘입어, 토르의 상처는 점차 아물어갔다. 그러나 토르의 머리에 막힌 숫돌 조각은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토르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괴로움에 시달렸다. 신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고, 마침내 방법을 찾아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발라(Wala/vala/Volva :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비한 마법이나 마법사)'의 마법의 주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과 이 주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미드가르드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들은 서둘러 미드가르드로 가서 그녀를 찾아 토르에게로 데려갔다.
- 무녀, 그로아. 칼 에렌버그 그림(1882. 출처 : https://nl.wikipedia.org/wiki/Gr%C3%B3a )
그녀는 '그로아(Groa : 성장, 성장하는)'라는 이름의 무녀(巫女, 또는 마녀라고도 전해짐)였는데, 미드가르드의 용사인 '아우르반딜(Orvandel, Aurvandill : 별 또는 물의 검으로 추정됨)'의 아내였다. 먼저 조심스럽게 토르의 상처와 숫돌 조각의 상태를 살펴본 그로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상처는 깊었고, 숫돌 조각이 박혀있는 위치가 좋지 않았다. 사실 그로아에게는 한 가지의 어려움이 더 있었다. 그로아가 토르의 머리에서 숫돌 조각을 빼낼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오래된 마법의 주문이었다. 마법이라고 해도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사용하는 것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마법은 너무도 오래된 마법이고, 자주 사용하지도 않는 마법이라 그로아는 간신히 주문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신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로아에게 물었다.
[어떤가? 빼낼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마법이라.. 제가 제대로 완수할 수 있을지..]
그로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시프가 그로아의 손을 잡으며 부탁했다.
[부탁해요. 이제 그대의 마법 말고는 방법이 없답니다.]
그로아는 시프의 손이 떨리는 것으로 그녀의 간절함을 느꼈다. 야른삭사도 시프의 곁에서 애처롭게 그로아를 바라보았다. 그로아도 전사의 아내였기에 누구보다도 시프와 야른삭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아는 용기를 내어 시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로아는 토르가 누워있는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고, 마법을 실행할 차비를 했다. 시프를 비롯한 토르의 가족들은 토르의 침대 곁에 자리를 잡자, 그로아는 천천히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방안 가득 그로아가 외우는 마법의 주문이 낯선 음률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법의 주문은 굉장히 길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로아는 침착하게 마법의 주문을 외워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괴로움으로 가득하던 토르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토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고통도 잦아들었고, 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토르의 눈에 곁에서 마음을 졸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좀 낫군.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여보, 정신이 들어요?]
시프가 양손으로 토르의 손을 붙잡았다. 토르는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시프도, 야른삭사도 모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토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의 반대편에는 스루드가 마그니를 안고 있었고, 티알피는 로스크바와 함께 문가에 서있었다. 그리고 한 낯선 여인이 방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무언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토르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시프가 토르에게 나직이 말했다.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서 데려왔어요. 미드가르드의 무녀인데, 당신 머릿속에 있는 그 걸 빼내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네요. 치료가 끝날 때까지 조금만 참아요.]
토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아의 주문은 계속되었고, 토르의 고통은 더욱 잦아들었다. 이제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로아가 주문을 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토르가 왠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곁에 있는 시프에게 물었다.
[혹시 저 무녀의 이름이 뭔지 알아?]
[아, '그로아'라고 하더군요.]
시프의 대답을 들은 토르가 '쿡!'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인연이군.]
시프와 가족들이 의아해하자 토르가 말했다.
[얼마 전에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었지? 왜 흐룽그니르 녀석이 난동을 부리기 바로 전에 말이야. 그때 난 얼음으로 가득한 북쪽을 다녀왔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이었어. '엘리바가르(Elivogs, Elivagar : 얼음 파도)'강가에서 한 인간을 만났는데, 나도 아는 녀석이었어. '아우르반딜'이라고, 아주 용감한 인간이지.]
토르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근데 녀석이 조난을 당해 혼자 개고생 하고 있더라고. 머리카락도, 수염도 얼어붙고 몸도 얼어붙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지. 난 녀석이 불쌍해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 난 주변에 있는 물건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녀석을 담았지. 녀석은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하더군. 난 바구니를 등에 짊어지고 엘리바가르 강을 건넜어. 강을 건너고 보니 녀석의 발가락 하나가 얼어붙어서 떨어져 버렸지 뭐야. 아무래도 바구니 밖으로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나 봐. 녀석,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몸이 얼어서 몰랐다나? 그래서 난 떨어져 나간 녀석의 발가락을 하늘의 별로 만들어 주었지.]
토르가 말을 멈추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런데 말이야. 강을 건너는 동안 녀석이 바구니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다 자기 마누라 이야기를 하더군. 자기 마누라가 얼마나 착하고, 예쁘다며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잠깐 말로 들은 건데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는 거 있지? 어휴~ 나도 한 팔불출하지만, 녀석은 나보다도 한술 더 뜨더군. 그래서 내가 물었지. '그래, 네 마누라 이름이 뭐냐?'라고. 그랬더니 녀석이 그러더군. '그로아'라고.]
어느덧 토르의 시선은 그로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로아는 멍하게 서서 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르의 이야기는 그로아에게도 들렸는데, 토르가 이야기 한 아우르반딜은 정말로 그로아의 남편이었다. 그로아와 아우르반딜은 금슬 좋은 부부였는데, 아우르반딜이 실종이 되어 그로아는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멍하게 서있는 그로아를 보며 토르가 웃었다.
[걱정 말게. 그대의 남편은 내가 잘 데리고 왔으니까. 지금은 착한 인간들의 마을에서 요양 중이지. 몸을 추스르면 곧 집으로 돌아갈 거야.]
토르의 말에 그로아는 너무 기뻐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소식이 끊겨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니.. 그로아는 우는 내내 토르에게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흑흑.. 고.. 고맙습니다. 흑흑..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로아,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이렇게 너에게 치료까지 받고 있으니. 여보, 내가 다 나으면 아무래도 그녀의 심장을 황금으로 만들어줘야겠어. 하하.]
토르가 밝게 웃었고, 시프와 다른 가족들도 모두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로아가 큰 소리로 탄식했다.
[아!]
토르와 가족들 모두 깜짝 놀라 그로아를 쳐다보았다. 그로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다고 할 만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남편을 구해준 토르의 이야기에 빠져 그로아는 그만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고 만 것이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토르와 그의 가족들도 곧 상황을 깨달았다. 시프가 그로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주문을 다시 외워줘요. 처음부터 다시 해봐요.]
그러나 시프의 다독거림도 무심하게 그로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주문을 어디까지 외웠는지, 어디부터 외우면 되는지는 고사하고, 마법의 주문 자체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토르와 가족들은 그로아가 마법의 주문을 다시 떠올리는 것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는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토르는 그로아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토르와 그의 가족들은 물론 신들의 실망은 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로아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게 만든 것은 토르였다. 그래도 마법의 주문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 토르의 고통은 많이 줄었다.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따금 머릿속에 박힌 숫돌조각이 흔들거리며 두통을 앓긴 했지만.
이때부터 사람들은 숫돌(또는 부싯깃돌)을 매우 조심해서 다루게 되었다. 특히 숫돌을 던지거나, 바닥에 내리치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사람들이 숫돌을 잘못 다루게 되면, 토르의 머리에 박힌 숫돌 조각이 흔들려서 토르가 두통을 앓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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