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기르(Oegir/Ægir : 바다)'는 바다의 신으로 불리지만 아사 신족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 신족도 아니다. 그는 요툰헤임의 거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미르와 서리거인의 후예다. 에기르는 거인 '표르노트(Fornjot : 의미 불명)'의 아들이고, 그에게는 '로기(Logi : 불, 우트가르드 로키의 부하인 로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추정됨)'와 '카리(Kari : 바람)'이라는 형제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신으로 불렸고, 신으로 대접받았다. 그만큼 에기르는 거인이면서도 신에 필적할만한 힘과 세력을 가진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그를 바다의 지배자로 인정해 주었고, 바다의 신으로 불리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한 때, 에기르가 신들에게 자존심을 부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 뒤로는 신들과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에기르도, 신들도 서로의 세력권에는 큰 관심이 없는데다가, 굳이 개입하지 않았다. 요툰헤임의 거인들이 이런 에기르에 대해 서운함이 없을리가 없다. 그러나 자신들도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보니 그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다.
넓은 바다의 대부분은 에기르와 그의 가족의 것이다. 에기르는 이 넓은 바다와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소유했고, 관리했으며 간섭했다. 특히,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이나 거인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대체로 이들은 아주 짭짤한 소득원이었다. 생존을 위한 식량이건, 거래를 위한 물품이건, 누군가에게 바칠 귀한 물건이건..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는 이런 것들이 실려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보니 에기르의 저택에는 귀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그 대부분은 바다를 항해하거나 침몰된 배에서 빼앗은 것들이다. 에기르의 저택은 '황금저택'이라고 불렸다. 황금저택은 이 보물들이 내뿜는 빛으로 낮에도, 밤에도 햇빛이나 따로 불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마저도 없을지라도 최소한 뱃사람은 있다. 바다에서 죽은 자는 에기르와 그의 가족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기에 에기르의 휘하에는 수많은 베테랑 뱃사람이 가득했다. 비록 죽은 자들이긴 했지만.
에기르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소유물을 늘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에기르는 자주 거친 바람을 불러오고,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수많은 배가 침몰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뱃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럴때마다 에기르의 재산은 늘었고, 휘하의 뱃사람(병사)도 늘었다. 물론, 에기르가 이것에 만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뿐만아니라, 에기르는 뱃사람들에게 때로는 씨가 마른 듯,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들이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거나 에기르를 불쾌하게 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장난이었다. 그로 인해 바닷가에 사는 뱃사람과 그의 가족들이 굶어죽기도 했지만, 그건 에기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육지는 에기르의 영지도, 에기르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 바다의 신 에기르와 그의 아내 란. F.W. 하이네 그림(1882. 출처 : https://sv.wikipedia.org/wiki/%C3%84gir )
이런 괴팍하고 이상한 성격은 그의 아내나 다른 가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기르의 아내, '란(Ran : 강도, 강탈)'은 '바다의 여신' 또는 '심해의 여신'으로 불린다. 그녀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도 에기르 못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물을 던져 뱃사람들을 익사시키는 것을 즐겼다. 바다에서 익사한 이들은 그녀의 소유가 되어 바다 밑바닥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서 그녀를 섬겨야했다.(북유럽에서 '란의 침대에 올랐다.'는 말은 익사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에기르와 란은 이런 성격이 잘 맞았던 것인지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둘 사이에 아홉 명의 딸을 낳았다.
에기르와 란이 낳은 아홉 명의 딸은 흔히 '아홉 파도의 여신'이라고 불린다. 그녀들은 부모를 도와 툭하면 거친 파도를 만들어 뱃사람을 공격하거나 익사시키곤 했다. 어떤 면에서는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은 에기르 혼자만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일궈낸 이름에 가깝다. 총수인 '에기르'와 CEO인 아내 '란', 그리고 그들의 '아홉 딸들'이 각자 계열사를 이끄는 전형적인 족벌기업이 바로, '바다의 신'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공포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에기르의 취미생활은 아주 평화로웠다. 에기르의 취미생활은 바로 '맥주 만들기'였다. 그는 아홉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에일(Ale : 과일향이 나는 무거운 바디감의 맥주)' 맥주를 빚기로 유명했다. 이런 에기르의 취미는 가족에게도 전해졌는지, 에기르가 맥주를 빚을 때면 그의 가족들도 늘 함께하곤 했다. 그 맛이 얼마나 좋던지, 아스가르드에 사는 신들도 에기르의 맥주라면 군침을 흘렸다. 툭하면 온갖 핑계를 대고 에기르의 저택에 놀러와서, 저택의 맥주통을 비우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 한 두번이야 에기르도 흡족하게 내어주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자 에기르는 신들의 방문을 귀찮아했다. 이 날도 아스가르드에서 온 신들의 사자(使者)가 에기르의 앞에 서있다. 사자의 이야기를 들은 에기르가 인상을 구기며, 사자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들이 잔치를 벌이는데, 지금 나보고 맥주를 내놓으라고?]
[내놓으시라는 건 아니고, 보내달라고 요청을 드리는거죠.]
사자는 에기르와는 다르게 아주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기르가 또 되물었다.
[요청? 날 부르지도 않았고, 불렀어도 갈 생각은 없는데도 말이지?]
[호방하기가 바다보다 넓은 에기르 님이시니 흔쾌히 내어주실거라 하셨습니다.]
사자는 여전히 아주 밝은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에기르의 표정이나 기분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거 하나 같이 뻔뻔하네. 누가 보면 맡겨놓은 줄 알겠어?]
[그럴리가요? 에기르 님의 술창고는 언제나 가득하니 맥주 조금 정도는 티도 나지 않을꺼라고 하셨습니다.]
자고로 종은 주인은 닮는다고, 사자는 자신의 주인 못지 않게 뻔뻔하기가 이를데가 없었다. 에기르가 대놓고 싫은 내색을 보여도 사자는 연실 벙글벙글거렸다. 홀 한쪽에는 에기르의 아홉 딸들이 모여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그녀들의 표정도 좋을리 없었다. 사자가 더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어쨌건 신들의 사자라 에기르는 눈짓을 보내 딸들을 진정시켰다. 에기르가 사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이걸 어쩌나? 요전에 우리도 연회를 하느라 지금 맥주가 똑! 떨어져 버렸는데? 지금 속성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양을 담글 통이 없어.]
[음.. 그러니까.. 안주신다는거죠?]
신들의 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안주는게 아니라 못주는거라고 해두지.(있어도 줄 생각이 없지만) 솥이 있으면 만들어 줄수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뭐, 그렇게 전해. 그럼 신들도 알아들을테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신들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들의 사자는 에기르에게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에기르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주시게. 나 에기르가 아주 아쉬워했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면 좋겠구먼. 하하!]
[네! 꼭 전하겠습니다.]
이 신들의 사자는 에기르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는지, 환하게 웃어보이고는 몸을 돌려 홀을 나갔다. 그런 사자의 뒷모습을 보며, 에기르의 딸 중 핏빛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가진 딸이 말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담? 짜증나! 저거 파도로 찢어버릴까?]
[셋째 언니, 그건 약하지. 그보다는 얼려서 조각 조각 내버리자. 꿀에 타먹으면 먹을만 할꺼야.]
싸늘한 눈을 가진 막내딸이 거들고 나섰다. 다른 딸들도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였는데, 딸들 중 가장 맏딸이 동생들을 진정시켰다.
[그만~ 거기까지. 아버지께서도 웃어넘기시는데 우리가 그러면 쓰겠니?]
[그럼 큰 언니는 저 꼴을 그냥 보아넘기자는 거유?]
하얀 거품이 이는 것 같은 드레스를 입은 딸이 맏딸에게 물었다.
[그냥 보내줘. 어차피 오래 못 살 놈이야. 저 성질 더러운 신들이 저걸 가만 두겠니? 저런거 상대해주면 우리 급만 떨어지는거란다. 그쵸? 아빠?]
큰 딸이 에기르를 바라보자, 다른 딸들의 시선도 에기르에게로 향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에기르가 가볍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러자 큰 딸이 다른 여덟 명의 동생들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덟 명의 딸들은 영 못마땅했으나, 아버지와 큰 언니의 생각이 그렇다니 도리가 없었다. 핏빛 머리카락을 가진 딸이 치마를 잡아 돌렸다.
[하아~ 진짜 우리 큰 언니는 너무 사람이 좋아! 너무! 아, 짜증나. 어디 싸움질 하는데 없나? 피라도 좀 봐야겠어.]
[언니, 아까보니까 해적 놈들끼리 한판 붙으려던 것 같던데.. 우리 거기 가서 놀다올까?]
아까부터 칼을 만지작 거리던 딸이 물었다. 그러자 핏빛 머리카락을 가진 딸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해적이라니 잘 됐네. 싸악~ 찢어버려야지. 막둥아, 너도 가련?]
[응. 재미있겠네.]
막내 딸이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딸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고 홀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홀을 가만히 둘러보던 에기르가 천천히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쩝.. 나도 심심하긴 하구먼. 흠.. 이번에는 어느 동네에서 가져온 '홉'을 써볼까나? 이번에는 꽃향기를 진하게 만들어봐?]
에기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리와 홉이 가득한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도 아주 맛있는 맥주가 만들어질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