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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Jul 26. 2023

22. 히미르의 솥-다섯 : 히미르의 술잔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토르, 티르, 히미르, 히미르의 술잔

#. 히미르의 술잔


히미르는 창고에 손질할 어구를 내려놓은 뒤, 잡은 물고기는 갈무리해 집으로 향했다. 히미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내(티르 어머니)가 그를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남편의 손에서 갈무리 한 물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건네 받으며 말했다. 


[오늘도 씨알이 좋네요. 오늘은 좋은 날인 갑소. 영감, 우리 아들도 돌아왔어라.]

[아들? 무신 놈의 아들?]


히미르가 퉁명스레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뾰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또또.. 우리 아들 티르 말여라. 모처럼 집에 왔당께요.]

[흥! 임자 아들인지는 몰러도, 내 아들은 아니구먼.]


히미르가 여전히 퉁명스레 대답했고, 아내는 못들은 척 물고기가 담긴 바구니를 들었다. 


[오늘은 울 아들이 친구도 함께 데려왔어라. 인간의 수호자, '베오르(Veor/Veur : 사원의 수호자)'라고 하네요. 그 친구가 영감헌티 뭔 부탁이 있는가봐요.]

[흥! 올테면 혼자 오지 뭔 군식구까지 딸려와? 거기다 부탁? 옘병하는구먼.]


 히미르는 영 귀찮다는 듯 짜증을 냈다. 아내를 앞세우고 현관에 들어서는데, 히미르의 앞에는 아주 귀찮고 거북한 인물을 발견했다. 티르가 데려왔다는 친구가 다름 아닌 토르였다. 히미르는 걸음을 멈추었다. 히미르의 검은 피부가 점차 욹그락 붉그락 변하기 시작했다. 히미르의 마음 속에서 분노와 공포, 적개심과 두려움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쳤다. 문득 히미르는 토르가 요르문간드를 낚을 때, 배 위에서 두려움에 떨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하의 히미르가 겁쟁이처럼 떨다니.. 히미르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감정이 서서히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존심과 분노였다. 히미르가 몸을 떨기 시작하자, 아내가 히미르를 말리며 말했다. 


[영감, 왜 그러고 섰소? 아들 친구 땜에 그러오? 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시오. 마치 영감을 피하려는 듯이 기둥 뒤에 붙어 숨어있지 않소? 진정허시오.]


- 요르문간드를 잡는 토르와 방해하는 히미르. 아이슬란드 삽화(18세기. 출처 : https://sv.wikipedia.org/wiki/Hymer )


 그러나 아내의 말이 히미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히미르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분노를 담아 토르를 노려보았다. 그의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히미르의 분노를 담은 눈길을 받은 박공의 대들보가 금이 가는가 싶더니,  둘로 쪼개져버렸다. 그 충격으로 기둥이 부러지면서 천장에 매달려 있던 솥들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중 하나가 토르와 티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솥은 히미르의 솥 중 가장 커다란 솥이었고, 토르와 티르를 뒤덮듯 떨어졌다. 마치 히미르의 분노가 담긴 시선에서 그들을 보호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머지 일곱 개의 솥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너무 놀란 히미르의 아내가 황급히 히미르를 말렸다. 


[아이고~ 영감! 집을 다 부 술 작정이요~! 울 아들이고, 손님이란 말이오!]

[옘병!]


 히미르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아내를 떼어내려고 하는데, 토르와 티르를 덮은 솥 한쪽이 들리면서 토르와 티르가 멀쩡한 모습으로 기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내는 안도했지만, 히미르는 분노와 아쉬움에 혀를 찼다. 토르는 히미르의 남다른 환대에 기분이 상했지만, 티르와 그의 어머니를 보아 참기로 했다. 그렇게 화를 삭이던 토르는 가만히 자신을 뒤덮었던 솥을 보았다. 이 솥은 아주 크고 튼튼했고, 히미르의 분노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에기르의 맥주도 맥주였지만, 토르는 더욱 이 솥을 가지고 싶어졌다. 티르가 자신의 양아버지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했는데, 히미르는 그 인사를 무시했다.


[흥! 뭐혀? 밥 안줄꺼여?!]


히미르가 토르를 노려보며 아내에게 소리쳤다. 


[야, 알겄어라~! 조금만 기다리시오!]

[어제 나가 잡아놓은 소가 있을꺼여. 한 세마리만 내오더라고. 껄쩍지근혀도 손님이니, 어쨌건 멕이기는 해야지.] 


 아내가 주방으로 가는데, 히미르가 다시 소리쳤다. 그의 눈은 여전히 토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토르는 그런 히미르의 시선을 아주 가벼운 미소로 응대했다. 히미르의 아내는 거세한 숫소 세 마리의 머리를 자른 다음, 한마리씩 불에 구워 저녁을 차렸다. 지붕이 날아가고 대들보와 기둥이 부러져 엉망이 되었지만, 식탁은 그런대로 남아있었다. 날씨보다도 싸늘하고 냉랭한 분위기에서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는데, 히미르와 토르는 여전히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히미르의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시선을 토르는 연실 가벼우면서도 싸늘한 미소로 응대했다. 히미르와 토르는 마치 서로 먹기 대결이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먹었는데, 먹는 것에 있어서도 히미르는 토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토르의 먹성이 어찌나 좋은지, 히미르가 수운 숫소 한마리를 다 먹기도 전에 토르는 구운 숫소 두마리를 먹어치웠다. 히미르가 비아냥거렸다.


[거 오지게도 쳐먹는구먼.]

[이건 간식꺼리지.]


토르가 피식거렸다. 히미르가 다시 말했다.


[그건 자랑이 아녀. 괴기(물고기)도 안 잡고, 밭도 안갈믄서 그리 쳐먹는 건 도둑놈 심보제.]

[내가 얼마나 낚시를 잘하는지는 지난번에 이미 보여준 것 같은데?]


토르의 대답에 히미르의 검은 피부 아래로 힘줄이 꿈틀댔다. 


[고것은 낚시라고 할수 없지. 힘으로만 지랄하는 건 누구는 못혀?]

[힘도 자랑인거지. 그러니 이렇게 먹는 것도 자랑이고.]


토르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했다. 히미르는 화가 나 손을 치켜들었는데 토르는 물론, 티르와 아내의 시선까지 느껴지자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히미르는 잠시 토르를 노려보다가 아내에게 말했다. 


[임자는 가서 내 술잔이랑 술을 좀 내어와. 밥상에 술이 없으면 안되니.]

 

 아내가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술과 히미르의 술잔을 가져왔다. 히미르의 술잔은 아주 컸고, 정교한 장식까지 되어 있는 아름다운 술잔이었다. 히미르가 자신의 술잔을 토르에게 들어보이며 자랑했다.


[이게 뭔지 알어?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술잔이지. 자네가 아무리 힘이 쎄다고 자랑질을 혀도 이 술잔도 못부수면 그건 힘도 아니여.]

[흥.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군. 줘봐. 내가 단숨에 부숴주지.]


히미르가 토르에게 술잔을 던지듯이 건넸다. 토르는 히미르의 술잔을 받아 잠시 살펴보았다. 다시 보아도 크고 장식이 아름다운 술잔이었다. 이런 술잔을 부숴야 한다는게 안타까웠지만, 자신을 우습게 보는 히미르에게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토르는 술잔을 들어 옆에 부서져 내린 돌벽에 대고 내리쳤다. 그러나 돌벽만 부서졌을 뿐, 술잔은 멀쩡했다. 히미르가 비아냥거렸다.


[고렇게 해서 잔이 부서질 꺼 같은가?]


토르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자신의 반대쪽에 크고 단단한 돌기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토르는 이 돌기둥을 향해 술잔을 힘껏 집어던졌다. 술잔이 날아가 돌기둥에 부딪히자, 부서지는 것은 술잔이 아닌 돌기둥이었다. 불꽃이 튀더니 돌기둥은 산산히 부서졌고, 벽의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토르는 돌기둥이 저리 되었으니 술잔도 부셔젔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미르의 아내가 무너진 돌 틈에서 건져낸 술잔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히미르가 다시 비아냥거렸다.


[하하! '흐롤르리디(Hlorridi : 토르의 다른 이름, 시끄러운 기수)'도 별거 아니구먼!]


토르는 슬슬 화가 났다. 히미르의 아내가 토르에게 술잔을 건네주며 속삭였다.


[돌벽 보다는 우리 영감 머리통이 더 나을거요. 먹는 것이 다 머리로 가는지, 우리집에서는 우리 영감 머리통이 가장 단단하니께.]


그 이야기를 들은 토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토르는 건네 받은 술잔을 손 위에서 몇번 던져잡더니 그대로 히미르의 머리를 향해 전력을 다해 집어던졌다. 히미르는 토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피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이마로 토르가 던진 술잔을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술잔은 히미르의 이마를 강타하며,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을 냈다. 머리에 술잔을 맞은 히미르는 잠시 어질거렸을 뿐, 머리에 큰 상처는 나지 않았다. 히미르가 정신을 차려보니 반으로 쪼개진 술잔이 자신의 무릎 위에 떨어져 있었다. 


[하아.. 내 술잔이 깨져 무릎 위에 던져진 것을 보니.. 아깝네. 좋은 건 늘 이렇게 떠나는구먼.]


히미르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에게 중얼거렸다. 히미르가 반으로 쪼개진 술잔을 들고 슬픔에 잠긴 동안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히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토르를 보았다. 


[그래, 나한테 용건이 있다고?]

[아, 저거. 내가 마침 당신의 솥이 필요해서. 그걸 좀 내어달라고 왔지.]


토르가 손으로 솥을 가르키며 대답했다. 히미르가 토르가 가르킨 솥을 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하.. 진짜 좋은 건 헛되이 떠나간다니께.]


히미르가 토르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좋아. 가지고 가. 대신 그 짝이 들고 갈 수 있다면 말이지.]

[그건 걱정마시게. 저 정도는 충분히 들고 갈수 있으니까. 하하!]


토르가 히미르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토르의 웃음소리는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히미르의 거실을 넘어 온 마을로 울려퍼졌다. 히미르는 자신의 거실도, 아름다운 술잔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솥까지 잃었다. 그러나 토르에게는 그 모든 것이 신경쓸 꺼리가 아니었다. 토르의 머리 위, 차가운 밤하늘에서는 별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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