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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Jul 27. 2023

22. 히미르의 솥-여섯 : 결심도 무심히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토르, 티르, 히미르

#. 결심도 무심히, 말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법


 히미르가 솥을 가져가도 좋다고 말하자, 토르는 더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고, 더 남아 밤을 지낼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처럼 어머니를 만나러 온 티르에게는 미안했지만, 이제는 빨리 떠나는 쪽이 좋았다. 토르가 말했다. 


[가자, 에기르가 기다릴테니까.]

[아.. 네.]


 티르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티르는 가급적 힘이나 주먹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진행하고 싶었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늘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티르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티르 어머니는 황급히 히미르에게 다가가 술잔이 부딪힌 이마를 매만지고 있었다. 히미르는 아내(티르의 어머니)를 째려보긴 했지만, 아내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티르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야 토르와 함께 돌아간다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티르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히미르는 어머니에게는 남편이었다. 마음같아서는 아스가르드로 모셔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이곳이 집이다.


[어머니..]

[.. 가야. 니 아부지는 내가 돌볼테니, 어여 가야. 다들 소리를 들었으니 몰려들 올꺼구먼. 니 할머니가 가만있지 않을꺼여. 어여, 가.]


 티르는 가만히 입술을 씹으며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티르는 솥으로 다가가 솥을 집어 들려고 했다. 그러나 솥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토르만큼은 아니지만 힘에서 누구에게 쉽게 지는 법이 없는 티르였지만 이 솥은 쉽게 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티르는 왼손에 더욱 힘을 주었지만 솥은 '요지부동(搖之不動 : 흔들어도 꼼짝하지 아니함)',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히미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네 놈 힘으로는 어림도 없어야~ 손모가지까지 그렇게 된 놈이 뭘 헌다고 그리 용을 쓰냐 쓰길. 쿡! 쿡!]


그러자 토르가 티르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티르는 오른손이 없으니 쉽게 이 솥을 들기 힘들 것 같았다. 


[내가 들테니, 넌 뒤를 봐주렴.]


 토르가 양 손을 솥 밑으로 집어넣더니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역시 아홉 세상 최고의 전사이자, 장사인 토르다웠다. 토르는 솥을 들어올리고는 그 아래로 들어갔다. 토르는 양 어깨에 솥을 걸쳐메었는데, 솥에 걸린 고리가 토르의 복사뼈 근처에서 짤랑거렸다. 토르는 그대로 쿵쿵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티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눈으로 다시 한 번 인사를 한 뒤, 토르를 뒤따랐다. 토르가 솥을 짊어진 채 앞서서 걸었고, 티르는 그의 곁에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솥이 크고 무겁긴 했지만, 토르에게 그렇게 무리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신은 마을을 지나, 마을 뒷편에 있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언덕을 오르는데, 티르가 솥을 두 번 두드리며 말했다.   


[형님, 먼저 가세요.]


 이상한 느낌이 든 토르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티르는 왼손에 검을 빼어들고 있었고, 언덕 아래에서 거인들이 떼로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인들은 하나 같이 덩치가 산만했고, 그 중에는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거인도 상당히 많았다. 하나같이 흉측한 몰골이었고, 하나같이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아들이 토르에게 수모를 당한 것을 안 그의 어머니(티르의 할머니)가 마을의 거인들에게 그 분함을 토로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의 거인들이 그녀의 요청에 응해 하나같이 떨치고 일어선 것이다. 그들은 토르와 티르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인들로서도 그동안 참을만큼 참았다. 스림에서 흐룽그니르에 이르기까지.. 아니 훨씬 전부터 거인들이 토르에 당한 것이 얼마던가. 거인들에게는 토르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토르에 대한 적개심이 피가되어 흘렀다. 게다가 이제는 가만히 있는 거인(히미르)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를 공격했으며, 그의 물건을 강탈했다. 거인들로서는 토르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할수 밖에 없다. 토르에 대한 분노가, 토르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고 이번에야 말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의 선두에 선 거인은 두 신이 아주 잘 아는 거인이었다. 바로 히미르였다.


 히미르는 이대로 자신의 솥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대로 계속 수모를 당할수 없었다. 잠시 침울해지긴 했지만, 소란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를 보며 히미르는 정신을 차렸다. 천하의 히미르가 더욱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토르에게 수모를 당했다. 이번에는 아내와 아들같은 녀석의 앞에서 그 수모를 당했으니 히미르는 자존심이 상해도 보통 상한 것이 아니었다. 히미르는 반드시 앙갚음을 하고 말리라 이를 갈며 토르와 티르를 뒤쫓았다. 토르는 선두에 선 히미르를 보며 앙연하게 웃었다. 티르가 히미르에게 손을 대게 할 수는 없었다. 티르 역시 전사의 신이었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머뭇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토르는 동생에게 양아버지의 피를 묻히게 할수 없었다. 


[동생아, 이거 잠깐만 들고 있어.]

[아.. 네.]


 티르는 다시 검을 집어넣고는 토르 대신 솥을 넘겨받아 양 어깨에 짊어졌다. 토르는 입을 크게 벌리며 얼굴을 풀었고, 다음에는 양쪽 어깨를 풀었다. 토르의 턱과 근육에서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오른손에 강철장갑을 끼고, 묠니르를 든 채 다가오는 히미르와 거인 무리를 맞이했다. 토르가 혀를 찼다.


- 거인들과 싸우는 토르. M.E.윙게 그림(1872.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Thor%27s_Fight_with_the_Giants )


[거,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긴. 줬으면 끝이지 뭘 다시 달라고 와.. 쯧.]


 토르는 거인들을 향해 묠니르를 집어던졌다. 토르의 손에서 떠난 묠니르는 수없이 거인들과 토르 사이를 오갔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한 두명 씩의 거인이 요툰헤임에서 니블헤임으로 전입신고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진 묠니르는 곧장 히미르를 향해 날아갔다. 묠니르는 히미르의 머리를 날려버렸고, 히미르마저 그대로 요툰헤임에서 니블헤임으로의 전입신고를 마쳤다. 히미르의 머리를 날려버린 묠니르를 다시 받아쥔 토르는 여러 면으로 기분이 씁쓸했다. 짧은 한숨을 내쉰 토르는 강철장갑과 묠니르를 다시 챙긴 뒤, 티르에게 다가갔다. 토르가 티르에게서 다시 솥을 건네받았는데, 티르도 언덕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히미르와 거인들의 시체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히미르도 히미르였지만, 그보다는 뒤에 남겨질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컸다. 토르가 이런 티르의 걱정을 모를리 없었다.


[티르, 가서 어머니를 모셔와. 이건 내가 에기르에게 가져다 줄테니.]

[.. 네.]


 티르가 토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있는 집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아마 어머니는 쉽게 집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히미르가 이렇게 된 마당에 어머니가 고향집에서 계속 살아가기는 힘들다.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는 티르는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작은 기쁨마저 느껴졌다. 


 한편, 토르는 언덕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 토르는 자신이 숨겨둔 마차에 솥을 실은 뒤, 다시 목과 어깨를 풀었다. 오랜만에 몸을 좀 풀어서 그런지, 그동안 뻐근했던 몸이 많이 좋아진 느낌이었다. 토르는 잠시 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가만히 뒷머리를 긁었다. 토르가 자신의 산양을 보며 물었다.


[아.. 놔.. 이번에는 진짜 힘으로 해결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이게 제일 빠르긴 하지?] 

[메에에~ 메에~ 메에에~]    


 마치 그렇다는 듯, '탕그뇨스트(Tanngnjostr : 이를 가는 자)' '탕그리스니르(Tanngrisnir : 이가 난 식용 어린새끼)'가 이를 갈며 울었다. 토르는 빙긋이 미소를 짓더니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에기르의 궁전을 향해 달렸다. 아직 차가운 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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