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히미르의 솥-일곱 : 배달왔어요!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토르, 에기르, 솥, 에일
#. 띵동~배달왔어요!
에기르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토르처럼 머릿 속에 숫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에 버금가는 만큼의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에기르의 앞에 정말 머릿 속에 숫돌이 들어있는 신, 토르가 크게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토르의 옆에는 에기르가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아주 커다란 솥이 함께 있었다. 토르는 한 손으로 솥을 유쾌하게 두드렸다. 솥이 울리는 소리가 에기르의 궁전 홀 가득 맑게 울려퍼졌다.
[어때? 소리 죽이지? 지금까지 이런 솥은 없었다. 이것은 '종(鐘)'인가~ '솥(釜, 鼎)'인가~ 하하!]
에기르는 난감함을 넘어 당황스러웠다. 분명 솥을 구해오면 만들어줄 수도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세상에 그런 솥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솥을 구해왔다. 그것도 다른 신이 아닌 토르가. 에기르가 아무리 묘책을 짜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에누리 없이 신들에게 맥주를 빚어주는 것 말고는. 토르가 천연덕스레 웃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어서 만들어주셔. 내 그동안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어떻게 창고에 에일 남은 것 좀 없을까? 아침도 못먹고 먼 길을 달려와서 그런지 목이 마르네? 배도 좀 고프고. 흠흠..]
[하아.. 기다시게나. 속성으로 만들어도 시간이 좀 걸리니까. 얘들아, 가서 천둥신에게 먹을 것 좀 내어주려무나.]
에기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맥주 재료가 있는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에기르의 하인들이 잔뜩 달려들어 토르가 가져온 솥을 낑낑거리며 밀고 갔다. 에기르의 아홉 딸들도 싫은 내색도 하지 못한채 말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토르의 먹성을 익히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보니 아무래도 오늘 주방 창고가 동이 날 모양이었다. 토르가 에기르와 에기르의 아홉 딸들의 뒷모습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 맥주를 빚는 에기르와 그의 가족들. 제니 니스트롬 그림(1893. 출처 : https://sv.wikipedia.org/wiki/%C3%84gir )[맥주는 시원한 걸로~! 잔도 시원한걸로~! 알지?!]
토르가 가져온 히미르의 솥은 그대로 에기르의 소유가 되었다. 정확히는 아스가르드의 신들 전용 술을 담그는 술솥이 되어버렸다. 해마다 수확이 끝나고 나면, 에기르는 이 솥으로 하나 가득 맥주를 빚어 신들에게 보냈다. 토르가 술을 빚는 솥을 구해오는 이번 이야기는 토르가 '농업(農業, agriculture)의 신'임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한 해 수확을 마치고, 거둬들인 곡식으로 술을 빚어 한 해의 결실을 축하하곤 했다. 토르가 술을 빚는 솥을 구해왔다는 것은 올해 수확이 좋았다는 반증이었다.
아, 토르의 복귀를 축하하는 연회는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아주 맛있고, 아주 즐겁고, 아주 북적북적한 연회가 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단 두 명의 신만이 기분이 언잖았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 그들은 오딘과 로키였다.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오딘, #토르, #단테, #norsemyth, #dante, #에기르, #맥주, #에일, #티르, #히미르, #히미르의솥
#PS01
에기르의 아홉 딸은 그 순서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원전에 기초하여 그 순서를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01. 큰 딸은 '히밍래바(Himinglæva : 하늘을 비추는 것, 투명한 것)'다. 그녀는 '햇살이 부서져 반짝이는 파도'를 의미하는데, 아홉 딸들 중 그나마 성격이 순한 편이었다.
-02. 둘째 딸은 '두파(Dufa : 던져지는 것, 던져지는 파도)'로 '요동치며 울렁거리는 파도'를 의미한다.
-03. 셋째 딸은 '블로두가다(Bloðughadda :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라고 하는데, 이름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녀가 바다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난 뒤, 피로 물든 파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04. 넷째 딸은 '헤프링(Hefring : 들어올리는 것)'으로 '마치 무너지듯이 부서지는 파도'를 의미한다.
-05. 다섯번째 딸은 '운느르(Unnr : 물결)' 또는 '우드르(Uðr : 검)'라고 하는데, '거센 파도'를 의미한다.
-06. 여섯번째 딸은 '흐론(Hronn : 파도)' 으로, '움켜쥐듯이 안으로 감싸 안아드는 파도'라는 의미이다.
-07. 일곱번째 딸은 '빌갸(Bylgja : 물결치는)'로 '큰 파도'를 의미한다.
-08. 여덟번째 딸은 '바라(Bara : 파도)'또는 '드로픈(Drofn : 바다 거품)'이라고 불리는데, '거품이 일어나는 파도'나 '해일급의 파도'를 의미한다.
-09. 막내인 아홉번째 딸은 '콜가(Kolga : 차가운 것)'로 북해에 이는 파도처럼 '아주 차가운 파도'를 의미한다.
#PS02
일반적으로 헤임달은 '아홉 명의 어머니를 두었는데, 그녀들은 모두 자매다.'라고 전해진다. 이모가 아닌, 직접 낳고 기른 어머니가 아홉 명이고, 그녀들이 모두 자매라는 말에 누구나 의문이 생길 것 같다. 이는 신화적인 표현이라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안 "헤임달의 어머니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현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 두가지의 의견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다.
- 어린 헤임달과 그의 아홉 어머니. W.G.콜린우드 그림(1908. 출처 : https://da.wikipedia.org/wiki/Hejmdal )먼저 '에기르의 아홉 딸들'을 '헤임달'의 어머니로 보는 의견이다. 이는 스노리가 쓴 '신(新) 에다'에 따른 것이다. 신 에다에 나오는 '스칼드스카파말(Skaldskaparmal : 시어법)'에서는 그녀들이 헤임달의 어머니 일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은 '거인 족의 아홉 자매'를 '헤임달'의 어머니로 보는 의견이다. 이는 '고(古) 에다'에 따른 것이다. 고 에다에 나오는 '힌들라의 시'에서는 에기르의 아홉 딸들과는 전혀 다른 아홉 명의 거인 자매가 등장한다. 이들 아홉 명의 거인 자매는 다음과 같다.
-01. 걀프(Gialp : 소리지르는 것, 포효하는 것)
-02. 그레이프(Greip : 손에 잡아 쥐는 것)
-03. 에이스틀라(Eistla : 의미 불명)
-04. 앙게이아(Angeia : 의미 불명, 괴롭히는 자로 추측됨)
-05. 울프룬(Ulfrun : 의미 불명, 늑대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됨)
-06. 에위르기아파(Eyrgiafa : 흉터를 주는 자)
-07. 이미드(Imd : 의미 불명)
-08. 아틀라(Atla : 논쟁하는 자 또는 작은 아버지)
-09. 야른삭사(Jarnsaxa : 강철 단검)
#PS03
이번 이야기에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조정하거나 덧붙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01. 원전에는 에기르의 아홉 딸은 등장하지 않지만, 너무 아쉬워서 등장시켰습니다. 사실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없거든요.
-02. 원전에서는 그냥 '잔치'라고 묘사됩니다. '신들이 물고기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려는데 술이 없었다.'로 시작하죠. 전 이것을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토르가 회복한 것을 축하는 잔치로 묘사했습니다.
-03. 히미르의 솥은 원전에 따라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솥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하고, '다락방에서 보관하던 솥'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중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04. 티르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러 가는 부분은 원전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순전히 저의 상상으로, 정황상으로도, 신화속에서 보여지는 티르의 성격상으로도.. 티르가 어머니를 두고 아스가르드로 돌아가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