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 : 릴 이야기 - 04화

테일큐브, 바드 단테, 단편, 이야기, 소설

by 바드 단테

▶ 예전에 적었던 짧은 이야기입니다.

마땅한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주인공의 이름으로 대신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야기의 프롤로그 부분으로 사용해 보려고 시작했다가 별도의 단편이 되었습니다.



◇ Prologue 1 - 4


자정이 다되어서야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조던은 다음 연출작 대본을 봐야 한다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로이는 부인의 잔소리 섞인 전화를 세 통이나 받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제이와 나는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거리를 걸었다. 어느새 우리는 시내의 중앙공원 외곽까지 걷고 말았다. 우리는 술을 깨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가까운 공원 의자에 앉았다.


"야, 릴. 세라는 지금 뭐 하면서 살고 있을까?"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던 제이가 벌게진 얼굴로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글쎄.. 아마도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 있지 않을까?"


나는 양손으로 외투를 안으로 당기며 대답했다. 4월의 밤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 큭... 좋은 아내? 좋은 엄마? 하하하~!"


제이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고개가 공원 의자 뒤로 넘어갈 정도로 웃어젖혔다.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던 제이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바로 잡았다.


"하아~~ 그래야지.. 그럼.. 그래야지.. 그럴 거야.. 누구를 버리고 갔는데.."


나는 아무런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잘 살 거야.. 그녀는.. 아마도..')


제이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말했다.


"야, 릴~ 릴~~"

"왜?"

"그거 기억나냐?"

"뭐?"


내가 고개를 들어 제이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거. 레모네이드. 얼음 띄운 레모네이드. 너 그게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하냐?"

".. 레모네이드가 레모네이드 맛이지 무슨 맛이겠어.."


난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아니, 왠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마치 그 시절의 세라가 내 앞에 서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것처럼. 잠시 뒤 제이가 말했다.


"그래.. 레모네이드는 레모네이드 맛이겠지."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순간 저 멀리 귓가에 낡은 인쇄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지독한 잉크냄새도 느껴졌다. 한여름의 무더운 동아리 사무실. 팔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슬슬 불평이 터져 나올 즈음. 어김없이 누군가가 사무실의 문을 특유의 리듬으로 세 번 두드린다. 그 노크소리는 행복의 소리고, 해방의 소리다.


pesce-huang-sSLqRCTJBvU-unsplash.jpg - 사진출처 : https://unsplash.com/ko/@pesce


문 앞에는 언제나 세라가 작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집에서 만들어온 시원한 레모네이드가 들어있다. 레모네이드의 위에는 크고 둥근 얼음 두 개가 떠있다. 그래 언제나 두 개다. 때로는 너무 새콤하고, 때로는 너무 달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나를, 내 영혼을 회복시켜 주는 아주 강력한 생명수다. 그녀는 언제나 고약한 입냄새를 풍기는 드래곤의 미로에서 나를 살아남게 해 준 작은 요정이다.


이제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나를 현실로 끌어올린 것은 제이의 목소리였다.


"야, 릴."

"왜?"

".. 나 그 레모네이드가 참 좋았다."

"그래.. 나도 참 좋았어.."


나도 제이처럼 공원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밤하늘을 보다 눈을 감았다. 술 때문인지, 입 속에서 마치 레모네이드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제이가 나를 불렀다.


"야, 릴~~~"

"왜~"

"그 책. 그 책말이야. 그 안에 네 녀석이 쓴 이야기도 있다는 거 기억해?"

".. 응?"

"응이라니.. 실망이다."

".. 그랬었나?"


한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때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난 세라에 대한 추억에서 갑자기 내가 썼다는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련히 몰려오는 레모네이드와 세라에 대한 추억이 오늘따라 너무 놓치기 싫었다. 가슴으로 세라의 추억을 붙잡던 나는 몸을 앞으로 일으켰다. 난 제이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였는데?"


제이는 잠이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제이는 공원 의자에 등을 기대어 있었고, 나는 그 곁에서 물끄러미 잠든 제이를 바라보았다. 4월의 차가운 밤공기가 천천히 공원 벤치 위로 흘러갔다.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 불빛이 마치 자신이 밤하늘의 별이라도 된 양 밝아보였다. 저 멀리 심야 버스 한 대가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arnold-mecses-WSxylP7XbwI-unsplash.jpg - 사진출처 : https://unsplash.com/ko/@odd_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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