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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Sep 19. 2023

25. 여신의 부동산 사업 - 둘 : 길피와 여행자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길피, 여행자, 스칼드

#. 현명한 왕 길피와 여행자


 미드가르드는 인간의 대지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을 무대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때로는 신과. 때로는 요정이나 난쟁이와. 그보다 더 자주는 거인들과의 이야기를 만드는 날도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미드가르드의 많은 이야기 중 하나다.


 미드가르드에는 많은 인간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중에 '스비쏘드(Svithjod, 현재의 스웨덴 지역으로 여겨짐)'라는 나라가 있었다. 스비쏘드는 '길피(Gylfe, Gylfi : 거친바다 또는 곡물의 지배자)'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다스렸다. 길피는 자신은 다른 바이킹의 왕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도끼질이나 해대는 그런 자들과 달리 자신은 교양 있고, 현명한 왕이라고 믿었다. 실제로도 길피는 아는 것도 많았고, 예절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길피는 스스로를 다분히 현학적(衒學的 : 학식이 있음을 자랑하는)인 왕이라고 생각했다. 길피는 세상의 많은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고, 그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 그런 만큼 길피는 늘 새로운 소식이나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당시에는 종종 여행자들을 통해서 이런 새로운 소식이나 이야기를 전달받곤 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북유럽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리는 스칼드다.) 길피의 왕궁은 이런 여행자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 있었다. 길피는 이들을 환대했고, 그들로부터 많은 새로운 소식과 지식을 얻었다. 그들 중에서 길피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답례를 하는 인심 좋은 왕이기도 했다. 그래서 길피의 왕궁에는 다른 왕궁보다도 더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웬일인지 한동안 길피의 왕궁에 여행자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여행자가 길피의 왕궁에 찾아왔다. 여행자는 가녀린 체구에 여성이었다. 그녀는 두건이 달린 옅은 녹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두건을 머리 깊숙하게 눌러써서 얼굴을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건 사이로 흘러내린 붉고, 갈색 빛이 나는 머리카락은 꽤나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그리고 외투 사이로 보이는 손은 하얗고 고왔다. 길피는 이 여행자가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길피는 오랜만에 왕궁에 찾아온 여행자를 더욱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낯선 이여! 나와 나의 왕궁은 그대를 환영하오!]

[진심 어린 환대에 감사를 드립니다. 길피왕이시여.]


 길피는 그녀의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그녀가 중년 정도로 나이가 든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길피의 왕궁 한쪽에 있는 탁자로 안내되었다. 그녀의 앞에는 충분한 음식이 차려졌고, 그녀는 감사하게 그것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길피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여행을 하며 들은 새로운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길피가 듣노라니.. 그동안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소식들이었고,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길피는 때로는 박수를, 때로는 무릎을 치기도 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찌나 이야기에 빠져들었는지, 길피는 날이 새는 것도 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났고, 길피는 피곤함도 잊은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내 지금까지 이처럼 다양한 소식과 재미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대는 정말 대단한 시인이 분명하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란 말인가?!]


 길피는 이처럼 자신을 즐겁게 해 준 그녀에게 무언가 제대로 된 답례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시인인 그녀를 자신의 궁정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길피는 곧 그녀를 붙잡아 둘 방법을 떠올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 날 즐겁게 해 주었으니, 그대에게 무언가 답례를 해야겠지! 이전과는 다른 즐거움이었으니, 답례도 이전과는 달라야 할 것 같군. 그대에게 내 왕국에 있는 경작지를 내려주겠네. 그렇지! 마침 왕궁의 서쪽에 아주 좋은 들이 있다네. 내, 그곳의 경작지를 그대에게 주겠네! 하하!]


 길피가 호방하게 웃었다. 땅을 가지게 된다면, 그곳을 쉽게 떠나긴 힘들 터. 설령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결국 그 땅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길피는 그녀와 같은 뛰어난 궁정 시인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땅을 가지는 것은 많은 이들의 꿈과 같은 일이니 그녀도 쉽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내 답례가 모자란가?]

[아닙니다. 왕이시여. 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을 했다. 그러자 길피가 황급히 물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게.]

[땅을 주심은 너무 감사합니다. 다만, 그 땅을 오랜 풍습에 따라 받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길피는 다시 호방하게 웃었다. 예부터 '여성은 소로 땅을 갈거나 소를 몰아 땅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길피는 알고 있었다.


[물론이네! 그거야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그리하지. 하하!]

[약속하시는 겁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더 묻자, 길피가 자신의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때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녀는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길피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만히 두건을 벗었다. 부드럽고 하얀 볼 옆으로 붉은 갈색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길피의 예상과는 달랐다. 중년은커녕 나이는 스무 살 중반이나 되어 보였고, 길피의 상상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길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 왕궁 서쪽의 들로 왕께서 주신 답례를 받으러 오겠습니다.]


 길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길피의 얼굴에는 엷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가 왕궁밖으로 돌아나가는 모습을 보며 길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길피는 자신이 아주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재주 많은 여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길피는 그녀에게 애초에 왕궁 근처의 작은 농장 하나 정도를 내어줄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길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옛 풍습대로 땅을 받기를 원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길피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욕망이 없는 자는 오히려 다루기 힘들다. 그녀의 요청은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길피가 아는 한 한나절 동안 여자가 소를 몰고 돌 수 있는 크기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길피가 본 그녀의 모습은 소를 모는 것과는 한참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소를 몰기에는 체구도 작았고, 그 부드럽고 하얀 손은 술잔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길피가 내어 주려고 한 것 보다도 더 적은 땅만 얻어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흠.. 그래도 인재를 얻는데 너무 인색해서도 안되지.]


 길피는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소를 몰아 얻은 땅이 자신이 내어주려고 한 것 보다도 적더라도 길피는 원래 자신이 생각한 대로 그녀에게 땅을 내어주자고 생각했다. 그것은 길피가 얼마나 관대하고 인정이 많은 왕인지 세상에 알리는 일이 될 것이다. 길피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 에다 삽화에 등장하는 길피(오른쪽,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ylf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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