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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Sep 20. 2023

25. 여신의 부동산 사업 - 셋 : 여신의 쟁기질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길피, 게뷴, 여신, 쟁기질, 황소

#. 여신의 쟁기질


 다음날 길피는 아침 일찍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왕궁을 나섰다. 길피는 아름답고 뛰어난 궁정시인을 얻게 된다는 기대감에 그의 마음은 아주 즐거웠다. 길피를 따라 몇몇 측근들도 함께 했는데, 그들도 왕의 기분에 맞춰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길피는 측근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왕궁의 서쪽에 있는 들판에 도착했다. 들판은 아주 넓고 푸르렀다. 이곳은 '스비쏘드(Svithjod : 길피의 왕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주 풍요로운 대지였다. 이런 곳에 경작지를 내어준다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길피의 마음에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길피의 눈에 여행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

[왕께서 내리신 것이 너무도 크고 귀한 것이라 지레 겁이라도 먹은 것이 아닐까요?]


측근 중 하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길피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허.. 해가 벌써 저만큼 떠올랐거늘.]

[아마도 소를 끌고 오느라 진땀이라도 빼나 봅니다. 하하.]


이번에는 다른 측근이 대답했는데, 앞서 말한 측근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본 그 여행자라면 소는커녕, 꽃하나도 심어본 적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하하!]

[하하! 자네도 그렇게 보았는가? 하긴.. 그 고운 손에 쟁기를 잡아보았을 리 없을 것 같긴 하네. 내가 대신 소를 몰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하하!]


길피가 크게 웃자 모든 측근들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한껏 웃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길피와 측근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측근이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왕이시여! 저기를 보소서!]


길피는 측근이 가리킨 쪽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곳에는 크다는 말로는 한참은 부족한 아주 거대한 황소 네 마리가 지축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길피와 측근들은 도망치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네 마리의 황소는 길피와 측근들의 앞까지 다가와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네 마리의 황소 뒤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전날 왕궁에 찾아온 여행자,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이 거대한 황소들을 몰고 온 것이었는데, 정작 그녀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좀 늦었군요. 이 아이들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이리되었답니다.]


 그녀의 미소가 어찌나 환하고 부드러운지 그제야 길피와 측근들은 두려운 마음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길피는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네. 괜찮아. 그.. 그런데 이 소들로 땅을 돌 생각인가?]

[네. 어제 약속하신 대로.]


 길피는 기가 막혔다. 이미 약속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거대한 황소를, 그것도 네 마리나 끌고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아담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이런 황소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전날도 그랬지만, 그녀는 길피의 예상과 많이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길피는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다. 이미 약속을 했고, 그것은 계약이다. 늘 그렇듯, 계약은 계약이다. 거기다 길피는 왕이고, 왕이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이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기가 막혀 멍한 표정으로 황소를 쳐다보는 길피에게 그녀가 물었다.


[흠.. 약속을 철회하는 것은 아니실 테죠?]

[무.. 무슨 말을! 난 길피 왕이라네.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지!]


 길피가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은 그가 얼마나 난감한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녀가 다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좋은 분이군요. 그럼, 약속대로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 소를 몰겠습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발걸음도 가볍게 네 마리의 황소의 뒤로 돌아갔다. 네 마리의 황소는 각각 두 마리씩 짝을 지었는데, 이 네 마리의 황소의 뒤에는 황소만큼이나 아주 커다란 쟁기가 묶여있었다. 이는 풍습에 따라 소를 모는 경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소의 뒤에 쟁기를 묶어 땅을 갈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쟁기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고삐를 채자 네 마리의 황소가 일제히 울음을 울더니 쟁기를 끌며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쟁기는 땅속 아주 깊은 곳까지 박혔는데, 그대로 들판을 가르기 시작했다. 쟁기가 지나간 곳은 마치 강줄기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깊고 넓게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길피는 다시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이제 길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생각이 완벽하게 틀렸다는 것을. 자신이 그녀를 완전히 잘못 보았다는 것을. 그녀는 아마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런 존재와 약속까지 해버렸으니 이건 무슨 짓을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 이제 길피는 말 그대로 눈뜨고 코베이는 꼴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길피가 이 모양이니, 그의 측근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저마다 망연자실, 아연실색하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런 길피와 그의 측근들과 달리 쟁기를 잡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쟁기질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모는 네 마리의 황소들도 힘이 들어하기는커녕, 즐거운 듯 발걸음도 가볍게 쟁기를 끌었다. 그녀의 콧노래와 네 마리 황소의 가벼운 발걸음은 해가 지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쉬거나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네 마리의 황소가 저 멀리 모습이 사라졌음에도 길피와 그의 측근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와 네 마리의 황소가 다시 길피와 그의 측근들 앞에 나타난 것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즈음이었다. 다시 길피의 앞으로 되돌아온 그녀가 네 마리의 황소의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환한 미소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가 한나절 동안 쟁기질을 한 땅이 어찌나 크던지, 길피의 예상과는 달리 나라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만큼의 아주 거대했다. 그것은 왕궁 서쪽에 있다는 넓고 비옥한 들판 모두를 포함하고 남는 면적이었다. 


- 네 마리의 황소를 모는 게뷴의 동상, 코펜하겐 게뷴분수, 안드레스 번가드의 작품(190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efjon )


 한나절 내내 이 모습을 지켜본 길피는 이제 체념을 넘어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길피에게 다가오더니 가만히 길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여전히 아침 햇살 같은 환한 미소와 함께. 그런 뒤 그녀는 쟁기를 떼어내 한 마리의 황소에게 걸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 있는 황소의 등에 올라탔다. 길피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대..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녀가 깜빡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내 소개를 하는 걸 깜빡했네. 난 '게뷴(게피온, Gefjon, Gefion, Gefjun : 주는 자)'이라고 해요. 음, 아스가르드에 살고 있죠. 길피, 당신이 준 땅은 아주 고맙게 가져갈께요. 우리 아이들에게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요.]

[여.. 여신이라고?!]


 길피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게뷴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삐를 챘다. 그러자 네 마리의 황소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발걸음은 대지가 아닌 하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나절동안 쟁기질을 한 땅이 그대로 하늘로 끌어올려져 게뷴과 네 마리의 황소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 네 마리의 황소는 원래 요툰헤임에서 온 거인들로 게뷴이 거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이다. 게뷴이 마법으로 그들을 네 마리의 황소로 변신시켜 데려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게뷴은 굳이 황소를 몰 필요도 없었고, 땅을 이처럼 깊고 넓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로 날아가며 게뷴은 길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요. 길피. 잘 지내고~ 앞으로 더욱 좋은 왕이 되길 기원합니다. ]


 길피는 이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고, 그의 측근들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저 멀리 석양 사이로 사라지는 게뷴과 땅덩어리를 바라보며 길피는 중얼거렸다. 


[대체.. 아사 신족이 어떤 자들이길래..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것인가? 저들은 대체 얼마나 현명하고, 얼마나 대단한 자들이길래.. 세상 모든 일이 저들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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