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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Oct 26. 2023

27. 발드르의 꿈 : 넷 - 아버지의 이름으로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발드르, 오딘, 예언

#.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스가르드를 떠난 한줄기 잿빛 섬광은 여러 세상을 뛰어넘어 죽음으로 가득한 곳을 향해 내달렸다. 천하의 슬레이프니르가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전력을 다해 달렸는데, 그럼에도 오딘은 그런 슬레이프니르를 연실 재촉했다. 긴 회의가 진행되면서 오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물음에 대답을 해줄 존재가 딱 하나 존재한다는 것.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오딘은 망설였다. 그러나 이 물음은 제 아무리 '미미르(Mimir: 물을 가져오는 자)'라고 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이제 남은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니블헤임(Niflheim : 안개의 땅)'에 도착한 오딘은 단숨에 저승의 강을 뛰어넘었다. 저승의 수문장, '가룸(Garum : 경계가 되는 것)'이 누군가 저승의 강을 뛰어넘는 것을 보고 짖어댔지만, 오딘은 그런 가룸 따윈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오딘은 그곳에서도 다시 동쪽으로 길을 잡았는데, 니블헤임의 깊숙하고도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 깊고 어두운 곳에 도착해서야 슬레이프니르는 여덟 개의 다리를 잠시 쉬게 할 수 있었다. 크고 깊은 어둠에 감싸여 있는 죽음의 늪 한가운데로 오딘은 걸어 들어갔다. 오딘은 자신의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응시했다. 


- 저승으로 달려가는 오딘. W.G.콜린우드 그림(188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ldr)


 지금의 오딘은 절실함으로 가득했다. 이번 일이 발드르의 목숨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로 연결될 것임을 오딘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예리한 눈은 이번 일이 신들의 운명을 넘는 그 어떤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딘은 자신의 창으로 바위를 두드렸다. 오딘답지 않게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오딘의 눈이 번뜩였다. 


[일어나라! 예언의 무녀여! 나, 오딘이 그대와 대화를 원한다! 어서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오라!]


 그러자 오딘의 주변으로 늪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듯 부글거렸다. 늪에서 무언가 안개 같기도 하고, 하얀빛 같은 것이 점점이 올라왔다. 그것들은 바위 위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 안개 같은 것은 이내 하얀 사자(死者)의 얼굴을 한 노파의 형상을 띄었다. 그녀는 눈동자가 없는 하얀 눈을 떴고, 멍한 표정으로 오딘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 험한 길을 달려와 나를 깨우는가?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거늘.]

[나는 '벡탐(Wegtam : 방랑자)'이다. 나의 질문에 답하라.]


 오딘이 말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였고, 그녀의 입가에도 천천히 미소가 지어졌다. 오딘은

그런 무녀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가만히 미소를 짓던 무녀가 입을 열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면서 나에게 무엇을 더 물으려 하는가?]

[질문은 나의 것이다. 넌 오직 내 질문에 답변만 하라. 내 질문은..]


오딘이 성난 목소리를 냈고, 무녀는 무덤덤하고도 차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발드르의 악몽.. 그것은 운명의 전주곡.. 이미 시작된 일.. 두려운가..? 당신이 우려하던 일이라..?]

[...]


 오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녀는 바위를 떠나 한참 동안 천천히 오딘의 주위를 맴돌았고, 오딘은  가만히 무녀의 답변이 이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무녀는 오딘의 주위를 돌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명은 언제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긴눙가가프의 그 깊은 골짜기에서도, 네가 내 앞에 서있는 지금도. 얼음 속에서 네 할애비의 머리칼을 드러나게 한 것도, 네가 또 다른 할애비인 이미르를 죽여 세상을 만드는 동안에도. 그동안 네가 못 본 척했던 것일 뿐.]


 무녀가 주변을 맴도는 동안 오딘의 하나 밖에 없는 눈이 그녀의 움직임을 쫓았다. 


[이제야 그것이 눈에 보인 것이야. 네가 생각하는 대로 일은 벌어지리라. 아무리 신이어도 이미 정해진 운명은 거스를 수는 없는 일. 네게는 괴로운 일이지. 신이랍시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야.]


 오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딘이 고개를 돌려 무녀를 노려보자 무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죽음의 늪 위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자만이란다. 부리의 아들아.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일을 안다 해도 그것은 비극과 고통만을 가져다줄 뿐이지.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그것은.. 이미 너의 집 앞까지 와 있느니라.]


 무녀의 말을 들은 오딘은.. 놀랍게도 떨고 있었다. 그렇게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애썼건만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인가. 오딘은 이를 꽉 물며 떨림을 삼켰다. 


[그렇다면 발드르는..]


무녀는 웃는 것인지 애처롭게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오딘을 보았다. 그리고 무녀가 대답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형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그 형제 역시 또 다른 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이다.]


 순간 오딘의 눈이 커졌다. 형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니. 결코 피를 볼 수 없는 아스가르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발드르를 죽인다는 형제란 누구란 말인가? 신들 중 발드르와 형제이며, 앞을 보지 못하는 신. 오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호드(Hoður : 전쟁)'. 호드인가? 발드르를 죽이는 자는?!]

[운명이란다. 그 아이 역시 자신의 운명을 따를 뿐. 허나 그 운명에 의해 그들은 손을 잡고 다시 세상을 빛으로 물들이겠지.]


 오딘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가까스로 창으로 바닥을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오딘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오딘은 그렇게 한동안 슬픔과 충격을 삼켰고, 무녀는 천천히 다시금 바위 위로 내려왔다. 슬레이프니르가 비탄에 잠긴 주인의 어깨를 부비며 그를 위로했다. 마침내 오딘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 되는 거지?]

[다 알려고 하지 마시게. 그럴수록 너의 고통만 커질 뿐.]


무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녀의 대답으로 들은 오딘이 크게 노했다. 그의 분노가 죽음의 늪 저 먼 곳까지 큰 물결을 일으켰다.


- 예언의 무녀를 만나는 오딘. 칼 에밀 도플러 그림(1876. 출처 : https://www.germanicmythology.com )


[상관없어! 이미 내 고통을 그 끝을 모르고 있지! 말하라! 앞으로의 일을!!]

 

순간 무녀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죽은 자의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대답했다.


 [슬픈 장례식. 신들은 이제껏 없었던 슬픔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지.]


 잠시 후 무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탄과 슬픔에 빠진 얼굴이었고, 그녀의 멍한 눈에서는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중상자(中傷者 :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을 헐뜯는 자, 대충 누구인지 감이 오시죠?), 모든 사기와 재해의 고안자가 징계에서 풀리는 날. 하늘의 빛은 사라지고 대지의 숨결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신들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고, 온 세상은 불에 타 재가 될 것이다. 당신에게 허락된 운명은 거기까지. 처참한 종말의 끝일뿐이야.]


 오딘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없이 서있었다. 무녀의 대답은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이후 침묵을 지켰고, 죽음의 늪에는 죽은 사자들의 웅얼거림과 같은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오딘은 낮고 싸늘하게 웃었다. 


 [큭... 큭.. 결국 그렇다는 말이지. 결국에는 말이야.]


오딘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검고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운명이여! 그렇다는 말이지? 신도 너에게는 장난감일 뿐이란 말이지?! 하하!!]


 오딘은 온 사자들의 잠을 깨울 듯이 크게 소리쳐 웃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저승의 모든 것들은 곧 귀를 틀어막았다. 저승의 공허함과 그 무자비한 어둠보다도 더욱 공허하고 비탄에 젖은 소리에 죽은 자들마저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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