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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Feb 07. 2024

28. 발드르의 안전 : 셋 - 어머니의 마음으로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발드르, 프리그, 오딘

#.어머니의 마음으로


 신들의 열의만큼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행 준비를 마친 프리그는 풀라와 함께 아스가르드의 성문에서 첫 번째 목록을 기다렸다. 신들에게서 첫 번째 목록을 받아 든 린이 서둘러 아스가르드의 성문으로 달려왔다. 첫 번째 목록을 넘겨받은 프리그는 가만히 목록을 살펴보았다. 프리그는 그동안 그보다 긴 문서는 본 적이 없었다. 길이도 길이였지만, 내용은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했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질리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러나 프리그는 오히려 미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씨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아들을 아끼는 신들의 사랑과 열의가 담겨있음이 느껴졌다. 프리그는 장밋빛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자신의 아들은 물론이고, 이런 신들의 사랑과 열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여정을 반드시 완수해내야 한다. 프리그의 곁에 선 풀라 역시 마음가짐은 프리그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풀라가 수행한 그 어떤 임무보다도 힘들고 고된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풀라에게는 오직 하나, 프리그를 위해 모든 것을 충실히 임하는 것만이 지금 그녀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풀라는 조용히 린에게 이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침내 프리그의 첫걸음이 떨어졌고, 첫 번째 목록을 받쳐 든 풀라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프리그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아스가르드의 성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프리그는 자신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발드르를 알리고,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름 없는 풀에서 대지와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에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진심과 정성으로 대했다. 그녀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흔쾌히 그녀의 요청에 응했다. 그중에는 신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요툰헤임의 거인들도 있었다. 거인들은 당연하게도 프리그를 냉담하게 대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오딘이나 토르, 다른 신들에게 가족이나 친구가 해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프리그는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다가갔다.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어미의 마음. 어미의 마음입니다.]


 그녀에게 호응을 보이지 않던 거인들도 그녀의 눈물과 진정이 담긴 요청에 점차 마음이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발드르나 프리그는 그들과 척을 진 적이 없었다. 솔직히 발드르는 거인들에게도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발드르는 그들이 거인이라며 적대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발드르는 오히려 그의 햇살같이 밝고 따뜻한 미소로 거인들을 대했다. 그렇기에 거인들은 아스가르드는 적대하면서도 발드르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프리그의 어머니인 '표르긴(Fjorgynn : 대지, 대지의 여신으로 불림. 때로는 프리그의 아버지로 등장하기도 함)'은 자신들과 같은 거인족이었다. 이는 발드르에게도 자신들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다. 발드르는 오딘의 적장자. 당장은 아니라 해도 언젠가 발드르가 오딘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면,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화. 아홉 세상에 대립과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마침내 요툰헤임의 거인들도 모두 프리그의 요청에 응했다. 프리그는 뜨거운 눈물로 그들의 호의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이런 거인들의 결심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프리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프리그, 요하네스 게르츠 그림(1888,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rigga.png)


 그녀가 다시 아스가르드의 서쪽에서 그 모습을 보인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그녀는 아홉 세상 중에서 일곱 세상을 다 돌았다.(아홉 세상 중 니블헤임은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 살아있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고, 무스펠스헤임은 프리그는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짐) 그녀의 망토는 더러워지고 너덜거리고 있었으며, 그녀의 신발도 밑창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프리그는 얼마나 지쳤는지 내딛는 걸음이 매우 느리고 불안했다. 그럼에도 프리그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고, 풀라 역시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프리그는 자신의 눈앞에 새로운 존재가 보일 때마다 풀라를 돌아보았다. 풀라는 신들이 적어준 목록을 꺼내어 찾아본 뒤 프리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프리그는 새로운 존재에게 말을 걸어 발드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프리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하얀 나무에 다가가 마치 나무에 몸을 기대듯이 한 손을 올려놓았다. 


[.. 그래, 고맙구나. 이제 세상의 어떤 존재도 우리 아들을 해치지 못하게 되었단다. 고맙다..]


 말을 마친 프리그는 순간 휘청거리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풀라가 황급히 프리그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지친 것은 프리그만이 아니었기에 풀라도 프리그를 부축하는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신들이 적어준 문서에 있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발드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러자 프리그와 풀라 모두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프리그는 힘이 다한 듯 쓰러졌지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풀라를 보았다.


[풀라.. 해냈어..]

[네.. 네.. 드디어.. 해내셨어요.]


 풀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풀라는 울지 않으려 했지만, 도무지 눈물은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프리그와 풀라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멀리 아스가르드의 성벽 위에서는 헤임달이 프리그의 여정을 따라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은 초조함으로 땀이 흘러 흠뻑 젖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프리그가 아스가르드의 서쪽에 나타났고,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신들은 프리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성벽 아래에서 대기 중이었다. 헤임달이 프리그의 도착을 알리자 모두가 프리그를 연호하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헤임달이 다시 신들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런! 프리그 님이 쓰러지셨어! 너무 무리하신 거야! 다들 어서 서둘러!]


 헤임달의 외침에 신들은 서둘러 프리그를 향해 바람같이 달려갔다. 프리그와 풀라가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있는 하얀 나무 아래로 신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프리그의 장남, 발드르였다. 발드르는 황급히 달려가 지쳐 쓰러진 어머니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받쳤다. 프리그는 천천히 눈을 떠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발드르를 보았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아들, 발드르. 그는 프리그의 빛이고, 지금은 그녀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프리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발드르의 얼굴을 메만졌다.


[우리 아들.]

[네.. 네..]


 발드르의 눈에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렸다. 발드르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 어느 때 보다도 크고 강하게 느꼈다.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발드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그저 감사와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는 발드르의 아내인 난나도 마찬가지였다. 발드르와 함께 달려온 난나는 진작부터 프리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어떤 것으로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을 하지 못하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는데, 이는 더 이상 비극과 두려움에 떠는 눈물이 아닌 안도와 평온의 눈물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신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때 풀라의 몸도 힘없이 뒤로 넘어갔고, 그나와 린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눈물을 훔치며 토르가 외쳤다.


[어서 프리그 님과 풀라에게 밀주를! 이둔! 제수씨! 빨리 청춘의 사과를 가져와요!]


 토르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신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맡은 임무에 따라 움직였다. 브라기는 봉밀주를, 이둔은 청춘의 사과를 가져와 프리그와 풀라에게 먹였다. 다른 신들도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헤임달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차! 마차는 어디 있는가?! 서두르게! 어서!]


신들은 마차가 들어오게 공간을 내어주었다. 마차에는 깃털과 구름을 넣어 만든 푹신한 담요가 깔렸고, 프리그와 풀라는 조심스럽게 들려져 그 위로 눕혀졌다. 프리그와 풀라를 마차에 눕히고 막 떠나려 할 때였다. 문득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던 프리그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마치 새집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얽혀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눈 하얀 나무와는 뭔가 다른 생김 같아 보였다. 피곤이 몰려와 침침해진 눈을 깜박이던 프리그가 가만히 풀라를 부르며 말했다.


[.. 풀라? 저건 뭘까? 나뭇..가지? 새.. 새집인 건가?]

[네, 어떤.. 아.. 나뭇가지 위에 있는 덤불같이 보이는 것 말씀이신가요?]


프리그의 곁에 함께 누워있는 풀라가 시선을 올려 나뭇가지를 살피며 대답했다.


[응.]

프리그가 낮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풀라가 천천히 품에서 신들이 적어준 문서를 꺼내 살펴보았다. 


[새집일까요? 새집.. 새의 집.. 아, 새집은 미드가르드에서 이미 만났던 아이예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아..]


풀라의 대답을 들은 프리그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그가 안심하는 모습을 본 풀라는 목록을 그대로 자신의 배 위에 펼쳐 둔 채,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자, 펜살리르로 가자.]


헤임달의 신호와 함께 프리그와 풀라를 태운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가 움직이자, 프리그는 살짝 눈을 떴다. 왜인지 프리그의 시선은 조금 전 보았던 나뭇가지 위의 새집으로 향했다. 프리그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 새집. 그래.. 새집이구나.]


프리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차의 흔들림은 마치 아기의 요람이 흔들리듯 부드러웠고, 오랜 여정에 지친 프리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프리그와 풀라를 태운 마차를 앞세우고, 신들의 행렬은 길게 이어졌다. 프리그를 펜살리르로 옮긴 신들은 프리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한동안 펜살리르 주변에 머물렀다. 


 다만 헤임달은 본연의 임무를 위해 아스가르드의 정문으로 돌아왔다. 헤임달은 아버지 오딘이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오딘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하리라. 그런 헤임달의 눈에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오딘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딘은 슬레이프니르에 올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의 양쪽 어깨에는 두 마리의 까마귀가 앉아있었다. 헤임달은 재빨리 성벽에서 내려와 성문을 열고 아버지 오딘에게로 달려갔다. 달뜬 표정으로 오딘에게로 달려가던 헤임달은 점차 발걸음이 느려졌다. 오딘의 모습은 매우 초췌하다 못해 검은 회색빛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대면, 재가 되어 부서질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헤임달은 그만 얼어붙듯 오딘의 앞에 멈춰 섰다. 그래도 프리그의 일을 듣게 된다면, 오딘이 기운을 차릴 것 같아 헤임달은 애써 놀란 표정을 거두며 입을 얼였다.


[아버지, 어..]

[.... 알고 있느니라.]


오딘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헤임달은 더 이상 말을 이을수 없었다. 프리그가 세상 만물로부터 발드르의 안전을 보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고 있음에도 오딘이 이런 모습이라면 분명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딘의 양쪽 어깨에 앉아있는 저 수다쟁이들(오딘의 두 마리 까마귀인 후긴과 무닌)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후긴(Huginn : 생각)' '무닌(Muninn : 기억)'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헤임달의 직감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 혼자 있고 싶구나.]


 헤임달이 한쪽 팔을 살짝 올리자, 오딘의 양쪽 어깨에 앉아있던 두 마리의 까마귀가 차분하게 날아올라 헤임달의 팔로 옮겨 앉았다. 오딘은 천천히 슬레이프니르를 몰아 자신의 궁전으로 향했다. 헤임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헤임달은 지금까지 이렇게 작고 초라한 아버지의 등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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