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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r 25. 2024

30. 발드르의 죽음 : 하나 - 스노리의 서가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스노리, 죽음

#. 스노리의 서가


 '백야(白夜 : 위도 48.55° 이상인 지역에서 여름동안 밤하늘이 밝아지는 현상)'도 끝나, 레이크홀트의 밤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 어둠을 머리에 인 언덕 위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 목동들이 양을 치며 머물기도 하고,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넣어두기도 하는 말 그대로 작은 오두막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목동이라기에는 너무도 이상한 이들이 머물렀다. 그들은 밤이 어두워졌는데도 불도 켜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기수르와 그의 부하 십여명이었고, 기수르의 조카 크래잉도 함께였다. 크래잉은 구석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연실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기수르의 부관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러다 피가 나겠군.)]


 부관은 시선을 기수르에게로 돌렸다. 기수르는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아니 그 어떤 미동도 없이 나무벽 사이로 난 창을 통해 먼 곳을 응시했다. 기수르에게는 안절부절 못하는 조카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기수르는 시선을 창 넘어 보이는 언덕 위 저택과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길 위로 말 한마리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홉마리.)]


 기수르는 가만히 저택을 떠난 말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크래잉이 전한 말에 따르면 저택의 말은 모두 세마리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오후부터 저녁 무렵까지 스노리의 신하들이 타고온 말의 수는 일곱마리였다. 스노리의 신하들은 이미 모두 떠나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스노리의 저택의 말은 한마리가 남았다. 


 이날 스노리는 자신의 심복 일부를 저택으로 불렀다. 섬 동쪽에 있는 일족들과 교회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회의를 위해서였다. 스노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힘을 기른 정적들과 맞서려면 보다 많은 힘을 모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섬 동쪽에 있는 일족들과 교회 세력은 꼭 필요했다. 스노리는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심복들 중 머리가 좋고, 말 잘하는 이들을 불러 각각 그들에게 동쪽의 일족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스노리의 교섭조건이 담긴 밀서를 가지고 저택을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다음으로는 교회였다. 스노리는 스트를룽 일족의 수장이며 알팅의 의장이라는 자리 말고도 교회의 일원으로서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노리는 자신의 전령들을 그들에게 보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아마도 이번 교섭으로 스노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섬 동쪽에 있는 이권 대부분을 내놓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 이권을 내어줌으로써 스노리는 동쪽의 일족들과 교회를 자신의 한쪽에 세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남는 장사다. 스트를룽 일족을 다시 섬의 정점에 세우기 위해, 스노리가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서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아깝겠는가?!


[(열마리..)]


 길 위로 마지막 말이 달려가는 것을 보며 기수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저택에 말은 한마리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크래잉의 정보가 틀렸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두마리가 있을 터. 그정도는 충분히 기수르의 계산에 있었다. 기수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 모습을 본 부관은 손을 들어 다른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문 옆에 서있던 자가 램프에 불을 붙여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그는 밖으로 나와 램프를 크게 한바퀴 돌리고는 손으로 램프의 앞을 가려 깜빡이는 신호를 만들었다. 그는 한번 더 이 행동을 반복하고는 서둘러 램프를 껐다. 오두막 안에서 기수르는 여전히 어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기수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밤에 어둠 사이로 무언가 작은 형체들이 움직였다. 그 형체들은 마치 늑대가 잠자는 양떼를 노리듯이 새까맣게 저택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수르가 가려서 뽑은 70명의 전사들이었다. 선두에 선 전사 몇이 조심스레 저택의 담을 넘었다. 

그들은 곧바로 대문 옆에 서서 졸고 있는 보초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의 잠을 깨우지 않은채로 그들의 숨통을 끊었다. 전사들은 조용히 대문을 열었고, 밖에서 대기중이던 다른 전사들이 바닷물이 차오르듯 조용히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곧바로 네 무리로 나뉘어져 자신들이 맡은 임무대로 움직였다. 


 한 무리는 저택의 담을 등지고 둘러싸 그 누구도 들고나지 못하게 했다. 다른 한 무리는 마굿간으로 가서 그곳을 점거했다. 또 다른 한 무리는 저택의 하인들과 보초들이 머무는 별채를 둘러쌌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무리는 본채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이들이 이번 일에 가장 핵심을 맡은 자들로, 기수르의 심복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조용하던 저택은 이내 놀란 외침과 싸우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하인들과 보초들은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기수르의 전사들에게 손쉽게 제압당해버렸다. 놀라 집밖으로 뛰어 나온 자들도 저택을 둘러싼 전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은 본채의 내부도 다르지 않았다. 


[이놈들! 대체 여기가 어딘 줄 아느냐! 여긴 의장 님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집사가 뛰쳐나오며 그들을 막아섰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의 도끼가 집사의 머리를 그의 몸에서 떼어놓았다. 그들은 곧바로 스노리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스노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침대가 헝크러진 것을 보아 그가 조금 전까지 침실에 있던 것은 분명해보였다. 


[이...잇! 이 영감탱이가 어디로 내뺀거야?! 뒤져! 똥통이건 뭐건 다 뒤져!]


 약간 키가 작은 전사가 다른 전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는 '시몬 크누트(Símon knútur)'로 기수르의 심복 중 하나였다. 전사들은 스노리를 찾아 본채의 이곳 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시몬은 자신의 검을 스노리의 침대에 꽂아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로 간거야.. 혹시? 비터, 이 영감탱이가 어디에 있을지 알것 같아.]


 시몬은 무언가 떠오른 듯 황급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곁에는 덩치가 산만한 전사가 서있었는데, 그도 시몬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르니 바이스크루(Arni beiskur)'로 역시 기수르의 심복 중 하나였고, 시몬과는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였다. 그는 흔히 '비터(the Bitter)'라고 불렸는데, 그가 그야말로 곰처럼 격렬하게 전장을 휘젓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아르니와 함께 스노리를 찾으며, 저택의 사람들을 죽이는 전사들을 뒤로하고 지하실로 향했다. 시몬은 크래잉으로 부터 저택의 지하에 장작을 보관하는 곳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하실에 다른 전사들은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시몬의 예상대로 지하실의 문은 잠겨있었다. 장작 창고의 문이 잠겨있을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분명 누군가 안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시몬이 아르니를 보며 고개 짓으로 문을 가르켰다. 아르니가 자신의 육중한 몸으로 문에 부딪혔고, 문의 경첩은 너무도 손쉽게 뽑혀나가버렸다. 


[헤헤..]


 시몬은 쾌재의 웃음을 흘렸다. 그의 예상대로 지하실의 안쪽에서 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시몬과 아르니는 횃불을 챙겨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지하실 안쪽에 쌓인 장작더미를 황급히 치우고 있었고, 그의 곁에 긴 회색수염에 나이 든 사람이 잠옷차림으로 서있었다. 그는 스노리였다. 


[찾았다.]


 시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스노리는 꼿꼿히 서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시몬과 아르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장작더미를 치우던 자가 황급히 스노리와 적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마도 그는 스노리의 하인이거나 심복 중 하나일 것이다. 시몬의 눈에 그의 어깨넘어로 장작더미가 무너져 내린 곳에 작은 쪽문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숨겨둔 탈출로일 것이라 여겨졌다. 


[이야~ 영감님..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계셨구만. 참 대단하쇼.]


 시몬의 말에 스노리의 대답 대신 그를 막아섰던 자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주인님, 어서 탈출을!]


 그러나 그 의기만 가상할 뿐이었다. 그는 머리로 아르니의 도끼를 받아내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자신의 하인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스노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선을 유지했다. 


[히야~ 이건 충성스러운 거야? 아니면 멍청한거야?]


시몬이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하인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 스노리는 여전히 그자리에 꼿꼿히 서서 물었다.  


[.. 누가 보냈나?]

[그런건 알아서 뭐하시게?]


시몬이 비아냥 거리며 대답했다. 아르니는 쓰러진 하인을 보며 머리에 박힌 도끼를 꺼낼지, 말지를 고민중이었다. 둘을 노려보던 스노리가 다시 물었다. 


[.. 콜베인이냐? 아니면.. !!]


 말을 이어가던 순간 스노리는 머리를 얻어 맞은듯 멍해졌고, 얼굴이 굳어졌다. 기수르. 다음으로 물어보려던 자의 이름이 떠오른 순간 스노리는 깨달았다. 


[(빠져나갈 수 없다.)]


 뭔가 하나씩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콜베인이라면 빈틈이라도 있겠지만, 기수르에게는 그런 것이 없을 것이다. 기수르는 젊은 나이에도 언제나 침착하고 매사에 신중했다. 전사로서도 훌륭했고, 무엇보다도 지휘관으로는 더욱 훌륭했다. 스노리도 기수르의 그런 점을 높이 사 자신의 딸과 혼인시켜 가족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기수르가 자신에게 아주 좋은 패가, 아주 좋은 검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은 것. 자신이 고른 검이 자신의 숨통을 자르는 검이 되어버렸다. 그런 기수르가 이렇게까지 준비해서 달려든 것이라면, 이제 이곳을 살아서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 방심. 스노리는 순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웃었다. 


[(나도 저물 때가 되었나보구나.)]


 잠시 스노리를 지켜보던 시몬이 중얼거렸다. 


[이 영감탱이가 드디어 미쳐버렸군. 비터? 끝내.]


 그러나 아르니는 여전히 자신의 도끼를 꺼낼지 말지를 고민 중이었다. 시몬이 아르니의 팔을 툭 치더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스노리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아르니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 옆에 있던 장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성큼 성큼 스노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제서야 스노리는 눈을 뜨고는 아르니를 노려보았다. 아르니는 무표정하게 장작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스노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스노리는 힘없이 쓰러졌는데, 아르니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스노리의 머리, 몸을 가리지 않고 스노리의 온몸을 장작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스노리의 몸 곳곳이 터지고,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스노리를 때리던 장작이 부러지자, 아르니는 곧 다른 장작을 집어들더니 쉼없이 스노리를 향해 장작을 내리쳤다. 그렇게 한참을 더 스노리를 말린 북어 때리듯 때린 뒤에야 아르니는 손을 멈췄다. 그제서야 뒤에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몬이 아르니의 곁으로 다가왔다. 스노리는 이미 온몸이 피로 뒤덮혀, 사람의 형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스노리의 정신은 아직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시몬과 아르니, 모두 스노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스노리의 입술이 움직였다. 


[.. 그만.. 때리거라...(Eigi skal hoggva)]


 시몬은 물론 아르니도 깜짝 놀랐다. '비터'라는 별명처럼 아르니의 완력은 무서웠고, 아무리 장작이라고 해도 그의 일격을 받고 살아난 전사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마지막으로 스노리는 숨을 거두었다. 섬의 주인이라 불리며 권력에 정점에 서 있던 자. 스트를룽 일족의 수장이자, 의회의 의장이었던 자. 정치나 권력이 아니었다고 해도 시와 문학만으로도 섬을 넘어 전 북유럽에 영향력을 끼쳤던 위대한 스칼드. 왕의 친구이자 휴식처였고, 결국 그 왕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잃은 자. 그런 그의 최후라기에는 너무도 허망하지만, 이런 것이 운명인지도. 1241년 9월 22일, 스노리가 숨을 거두었다.



- 레이크홀트에 있는 스노리의 동상(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through-my-ey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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