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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pr 11. 2024

31. 발드르의 장례식 : 다섯 - 가시리잇고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발드르, 장례식, 난나

#. 가시리, 가시리잇고


 난나는 장례식으로 향하는 내내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발드르의 곁에서 그의 모든 기쁨과 행복, 아픔과 괴로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녀. 발두르가 그토고 차갑게 식었을 때, 그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차갑게 식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충격으로 쓰러져버렸다.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남편을 구할 힘이 없었다. 헤르모드가 기꺼이 발드르를 구하러 가겠다고 할때에도 간절한 마음만 전할수 밖에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남편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남편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난나는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발드르가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나 오딘은 발드르의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다. 난나는 이번에도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프리그처럼 오딘에게 대들지도 못했고, 그녀처럼 미친듯이 울부짖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아픔과 슬픔이 프리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단지 그 남편을 잃은 아픔과 슬픔이 말로는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커서 그녀의 모든 감각을 완전히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렸을 뿐. 발드르의 장례준비가 이어지며 신들이 상복을 짓고, 제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발드르의 시신 곁을 떠나지 못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엇다.  


 여신들은 이런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를 보다듬어주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었다. 여신들은 위로를 하고, 한편으로는 다그치기도 하며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했다.  보다못한 여신들은 외아들인 포르세티를 데려와 아들을 봐서라도 힘을 내야 한다고 용기를 북돋으려 노력했다. 발드르를 쏙 빼닮은 아들. 난나는 포르세티를 끌어안고 한바탕 서럽게 울고 나서야 잠시나마 기운을 차렸다. 어머니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는 아들의 얼굴에서 남편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남편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아들을 잘키우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그때부터였다. 난나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기 시작한 것이. 마치 가슴속에서 커다란 바위같은 것이 난나의 온 감각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울지말자. 그 이가 가는 길 발이 무겁지 않게.)]  


 그렇게 수십, 수백번을 다짐한 그녀였지만, 상복을 입고 장례식으로 향하게 되자 그녀의 다짐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려버렸다. 한편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마음을 짓누르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 반복되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상주석에 앉아있으면서도 그녀의 눈은 발드르에게로 향했다. 헤니르의 인도로 발드르의 시신이 흐링그호른으로 옮겨지자, 그녀의 눈도 함께 움직였다. 난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 안녕히.. 내 사랑.]


 흘릴만큼 흘렸다고도 생각되었지만, 난나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난나. 내 사랑..]

 순간 난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인지 발드르의 목소리가, 사랑한다는 그 속삭임이 너무도 선명했다. 난나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변에는 슬픔에 빠진 오딘과 프리그, 포르세티가 있을 뿐이었다. 그 주변으로도 슬픔에 잠긴 조문객들이 보일 뿐, 너무도 당연하게 발드르는 그 자리에 없엇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그의 음성을 들었다. 너무도 생생한 발드르의 목소리였다.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난나는 다시 발드르의 시신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발드르의 시신이 흐링그호른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발드르가 그녀를 홀로 남겨두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슬픔이 너무도 지나쳤던 것일까? 남편의 목소리는 계속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짓던 발드르의 미소가 떠오르며 난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난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그녀는 가슴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하.. 하아..]


 난나의 몸이 신기루처럼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마음의 슬픔과 몸의 고통속에서도 발드르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프리그가 깜짝 놀라 자신의 며느리를 끌어안았다. 난나는 프리그의 품에 안겨 힘겹게 손을 뻗었다. 마치 발드르가 자신의 눈앞에 있기라도 한듯,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그녀는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난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 발드르를 부르는 난나(직접그림)


 [발드르!]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천갈래, 만갈래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난나의 손이 잠시 떨리는가 싶더니 힘없이 모래밭으로 떨어졌다. 사랑하는 남편을 홀로 보낼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난나도 발드르를 따라가고 말았다.


[안돼.. 안된다.. 아가.. 우리아가.. 너마저.. 너마저..]

 

 프리그는 난나를 품에 끌어안고 다시금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들에 이어 아끼는 며느리까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가까스로 참아온 슬픔이 다시 터져나왔다. 포르세티도 어머니인 난나를 부여잡고 한없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오딘은 황급히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천하의 오딘이라고 해도,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런 아픔과 슬픔은 이전에는 익히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오딘은 숨을 참아가며 슬픔을 삼켰다. 입은 너무 굳게 다물어 떨렸고, 그의 목에는 힘줄이 불거져나왔다. 난나까지 발드르를 따라가게 되자, 장례식장에 모인 이들의 충격도 컸다. 그때까지 슬픔을 견디던 조문객들도 결국은 참지 못하고 모두가 아파하며 크게 울었다. 장례식장의 경계를 서던 전사들 까지도 창을 짚고 선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한참만에 슬픔을 삼킨 오딘이 가만히 헤임달을 불렀다. 두 눈이 토끼처럼 붉어진 헤임달이 오딘에게로 다가왔다.


[우리 며늘아가를.. 난나를 발드르의 곁에 눕혀다오. 함께.. 둘이 함께 할수 있도록.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려무나.]


 헤임달은 손으로 눈물을 훔친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임달은 헤니르와 몇몇 여신들을 불러 난나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발드르의 곁에 함께 눕혀주었다. 드디어 남편과 함께 할수 있게 되어서일까? 커다란 고통 속에 숨을 거둔 난나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발드르와 난나가 흐링그호른에 자리를 잡자, 신들은 장례를 위한 제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 발드르에게 마지막 말을 속삭이는 오딘, W.G.콜린우드 그림(190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ldr)


 제일 먼저 오른 것은 발드르의 애마였다. 신들은 발드르의 말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단장하여 흐링그호른으로 올려보냈다. 다음으로 오딘이 프리그와 함께 흐링그호른에 올라 아들과 며느리에게 작별인사를 전했다. 오딘은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 '드라우프니르(Draupnir : 떨어지는 것)'를 빼내어 아들의 손에 끼워 주었다. 오딘은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가만히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오딘이 자신의 아들에게 무엇이라 말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프리그는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의 손을 잡게 해주었고, 이들의 볼에 입맞춤을 했다. 오딘과 프리그가 내려오자, 신들을 비롯한 조문객들이 준비한 제물들이 흐링그호른의 앞에 모여들었다. 이 제물들은 흐링그호른의 갑판으로 옮겨졌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배 흐링그호른의 갑판이 비좁을 정도였다. 모든 제물들이 흐링그호른에 오르자, 헤니르와 토르가 흐링그호른에 올랐다.


 헤니르가 불을 붙였고, 토르는 자신의 망치 묠니르를 꺼내들고 불 앞으로 다가갔다. 토르는 묠니르를 들어 발드르와 난나를 태워줄 불을 정화하며, 기원을 올렸다. 토르는 천둥과 벼락의 신이면서도, 관혼장제에서 정화를 담당하는 신이기도 했다. 토르의 눈에서는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보다도 더욱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과 한 배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발드르는 토르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형제였다. 토르의 머릿속에서 발드르와 함께한 그 모든 순간들이 천천히 지나갔다. 토르는 서장자이고, 발드르는 적장자였지만 그것이 이들 형제의 사이를 갈라놓지는 않았다. 토르는 늘 밝고 상냥하며, 순수하고 착한 발드르를 더없이 사랑했다. 아기때는 어찌나 예쁘고 귀엽던지, 정말 물고 빤다는 말이 들릴정도로 토르는 발드르를 업어주고, 목마를 태워주며 함께 지냈다. 발드르도 아버지처럼, 큰 형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토르를 믿고 따랐다. 고민이 있을 때면 토르에게 상의했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토르의 술자리에 놀러와 그의 무용담을 즐거워하며 들었다. 몇 번인가는 같은 무용담을 들려주었지만, 발드르는 늘 처음 듣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동생을 떠올리며 토르의 감정은 더욱 복받쳤고, 덩달아 장작의 불길도 크게 일어났다. 이 순간이 가장 순수한 정화의 순간이었다. 토르가 정화와 기원을 마치자, 헤니르는 그와 함께 흐링그호른에서 내려왔다.


헤니르는 이어서 장례를 집전하고, 토르는 자리로 돌아오려던 때였다. '리트(Lit/Litr : 색이 있는)'라는 난쟁이가 그만 자리로 돌아가던 토르와 부딛히고 말았다. 난쟁이 특유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리트가 자신들의 자리를 벗어나 흐링그호른 근처까지 숨어들어왔다가 토르의 앞길을 막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을 잃은 슬픔에 기분이 상해있던 토르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리트를 내려다보았다. 거인들도 감히 똑바로 볼수 없다는 토르의 분노를 본 리트는 오금이 저려 움직일수 없었다.


- 난쟁이를 걷어차는 토르, 에밀 도플러 그림(190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Litr )


[그렇지 않아도 제물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군.]


 토르는 완전히 얼이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리트를 불타고 있는 흐링그호른을 향해 걷어차버렸다. 리트는 본의아니게 '번제물(燔祭物 : 불태워 바치는 짐승이나 제물)'이 되어 그렇게 장작더미의 불길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불은 제단을 태우고 흐링그호른은 천천히 바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제단을 태운 불은 서서히 흐링그호른의 전체로 번져갔다. 마치 의식이라도 있는 듯 제단을 뒤덮은 불은 발두르와 난나, 그들의 사랑과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을 천천히 불태우며 한줄기 맑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흐링그호른이 점점 작아져가고, 드디어 하나의 점이 되었다. 에기르의 들판을 뒤덮은 맑은 구름도 천천히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그 누구도 장례식장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다. 그제서야 조문객들도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신들이 에기르의 들판을 떠나 아스가르드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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