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리 : 어디보자.. 그렇지! 이왕 로키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로키 이야기로 하나 더 해주마.
스노리가 다시 수염을 쓸었다. 스튤라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튤라 : 아~ 이거 정리 다하면 해주시라구요!
스노리 : 이건 로키가 벌인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지. 로키가 세상의 파멸을 이끌 세 명의 아이를 낳은 이야기지.
스노리의 말을 들은 스튤라가 물었다.
스튤라 : 파멸의 세 아이요?
스노리:글쎄? 궁금하니? 자, 그럼 이야기를 해주마.
스노리가빙긋이 웃었고, 스튤라는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파멸을 부르는 아이들
로키에게는 '앙그르보다(Angrboðar : 설익은 여자, 혹은 슬픔을 가져오는 자)'라는 첩(또는 첫번째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강철 숲에서 혼자 살고있는 거인족 마녀였다. 앙그르보다는 로키보다 나이도 많았고, 외모도 할머니에 가까웠다.로키는 앙그르보다를 만나기 위해 자주 강철 숲으로 찾아왔다. 앙그르보다는 로키를 의심했고, 내치기도 여러번. 그럼에도 로키의 구애는 끈질겼고, 앙그르보다는 로키의 첩이 되었다.
사실 로키에겐 속셈이 있었다. 로키는 머리도 좋았고, 오딘만큼이나 지식욕도 강했다. 안좋은 쪽으로 사용해서 문제였지만. 로키가 앙그르보다에게 접근한 것은 그녀가 알고있는 비밀스런 마법지식 때문이었다. 로키는 종종 앙그르보다의 곁에 머물렀고, 그녀가 지닌 마법지식을 배웠다. 물론 이 관계가 마법지식만으로 유지된 관계는 아니었다. 어느덧 앙그르보다는 로키의 아이를 가졌다. 로키는 약간 난감했지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신들 사이에서 '축첩(蓄妾 : 아내 이외에 첩을 들이는 것)'은 드물지 않았고, 아내인 '시긴(Sigyn:포승줄을 헐겁게 하는 자)'에겐 대충 둘러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달에 가까워질수록 앙그르보다의 배는 유난히 크게 불러왔다. 시간이 흘러 앙그르보다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고령에 산후상태가 좋지 않았던 터라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죽지 않았다는 설도 있음)
이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도 있다. 로키가 앙그르보다를 죽였다는 내용이다. 앙그르보다가 지닌 마법지식을 가지고 싶었던 로키는 그녀를 죽이고, 심장을 도려내어 불에 구워 먹었다.(마법의 힘이 심장에 깃든다고 믿었음) 그러자 점점 로키의 배가 불러왔고, 로키가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진실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로키가 앙그르보다의 마법지식을 원했던 것과 그 과정에서 세 명의 아이를 얻은 것은 분명하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세 아이를 앞에 둔 로키는 이번에는 진짜로 난감했다. 남녀사이였으니 아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고, 실제로 앙그르보다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로키는 자신의 눈 앞에서 강보에 싸여 잠이 든 세 아이를 보았다. 보면 볼수록 뒷목이 뻐근해졌다.
[그렇다고 이런 괴물들을 원한 건 아니었다고..]
앙그르보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하나같이 흔한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모두가 기괴하기 짝이없는 괴물같은 모습이었다. 처음으로 태어난 것은 '짙은 색의 털을 가진 늑대'였다. 나중에 '바나르간드(Vanargandr : 파괴의 지팡이)'로 불리는 '펜리르(Fenrir/Fenrisulfr : 습지에 도사리는 자)'다. 펜리르는 아주 매서운 눈과 큰 입, 그리고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늑대였다. 두번째로 태어난 것은 '커다란 뱀'이었다. 나중에 '세계의 뱀', '대지의 뱀', '미드가르드의 뱀'으로 불리는 '요르문간드(Yormungandr : 대지의 지팡이)'였다. 요르문간드는 커다란 몸과 강한 힘, 아주 치명적인 독을 지녔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것은 그나마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헬(Hel : 서리로 뒤덮는 자)'이라고 불렸다. 헬을 처음 본 로키는 다행이다 싶었지만, 아이를 돌려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몸의 절반은 아름다웠지만, 나머지 절반은 썩어들어간 시체같은 모습이었다.
- 파멸을 부르는 세 아이. 펜리르, 요르문간드, 그리고 헬
로키는 세 아이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에게 맡겨서 키워야 하나 싶었지만, 이런 괴물같은 아이들을 기꺼이 맡아줄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스가르드로 데려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내인 시긴은 착하디 착한지라, 자신이 눈물로 호소하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다. 다만, 다른 신들이 대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솔직히 이대로 강철숲에 버려두고 가거나, 어디 다른 곳에 버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같아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모른척 내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키는 어디 다른 몸뚱이에 달린 뇌에 판단을 미루고 싶었지만 막상 마땅한 뇌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어쩌지? 오딘? 미미르? 아.. 이런걸로 날 도와줄리가... 없겠지..? 아놔...]
로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머리만 감싸쥐었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났고, 로키는 깜짝 놀랐다. 문 밖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로키를 불렀다.
[로키님.]
로키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로키의 앞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으로 된 망토를 쓴 자가 서있었다. 그의 뒤로 마찬가지의 복장을 한 이들 서넛이 멀찍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로키가 그들을 노려보자, 문 앞에 선 자가 조용히 말했다.
[저희는 오딘님께서 보내신 자들입니다. 그 분의 시종들입니다.]
놀란 로키의 눈이 커졌다. 문 앞에 선 자가 말을 이었다.
[오딘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로키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오딘이 이미 알았다면, 생각할 시간도,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로키의 비상한 머리가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깐.. 오딘이 이걸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이렇게 은밀히 나를 불러올린다라.. 그것도 아이들을 데리고.. 하!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만.) 알았다. 금방 나오겠다. 기다려라.]
로키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문을 닫았다. 로키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오딘이 자신을 어떻게 하려고 부른 것 같지않았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처리하는게 더 쉬울테니까. 아이들까지 데려오라는 말에, 로키는 오딘이 어떻게든 처리해 주겠구나 싶었다. 아이들을 살리든, 죽이든, 버리든.. 그 결정은 오딘이 내려줄 것이다.동시에 어느 쪽이건, 그 책임은 오딘의 몫이 될 것이다. 로키는 오딘에 결정에 따라 적절한 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아이들을 아스가르드에서 살게 해준다면, 아내에게 눈물 연기를 하면 되는 일. 설령, 아이들을 죽이거나 버린다면, 자신은 오딘에게 아이를 잃은 불쌍한 아버지인 척하면 되는 일이었다. 로키는 강보를 더 꺼내어 세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꼼꼼히 감쌌다. 잠시 후, 로키는 세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오딘이 보낸 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스가르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