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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Jan 11. 2023

06. 파멸의 세 아이-여섯 : 티르의 오른손

북유럽신화, 티르, 펜리르, 글레이프니르

#. 티르의 오른손


스키르니르는 조용히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역시 헤임달을 제외한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신들이 반갑게 스키르니르를 맞이했다. 신들은 스키르니르가 글레이프니르를 내놓았을 때는 의아해했지만, 설명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이번에야말로 펜리르를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신들은 마음을 다잡고 펜리르에게로 향했다. 마침 펜리르는 호수 위에 있는 섬에서 낮잠을 자려던 참이었다. 처음 이 곳으로 내던져진 때부터 이곳은 펜리르에겐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신들이 다시 나타나자, 펜리르가 누운 채 짜증을 냈다.


[아, 지겨워! 그만 좀 귀찮게 하지?!]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네가 이걸 끊으면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겠다.]


신들이 대답했다. 그러자 펜리르가 고개를 들었다. 호수 건너에 신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있는 섬으로 건너오라는 듯 펜리르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신들 중 몇몇이 글레이프니르를 들고 조심스럽게 펜리르가 있는 섬으로 건너갔다. 신들이 건너오자 펜리르가 물었다.


[이번엔 또 뭘로 묶으려고?]

[펜리르, 네가 이 끈을 끊을 수 있을까? 뭐, 이전에 쇠사슬도 끊었으니 이런 가는 끈 정도는 우습겠지만.]


신들이 글레이프니르를 꺼내보이며 대답했다. 펜리르는 가만히 끈을 훑어보았다. 보기엔 부드럽고 약해 보였지만 왠지 기분이 껄끄러운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신들이 이전 사슬보다도 약해보이는 끈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었다. 펜리르가 하얀 이를 들어내며 으르렁거렸다.


[하! 내가 숲 속에서 산다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줄 알아? 이건 마법에 걸린 끈이지?! 내가 속을 것 같아! 세상에 어떤 늑대가 '날 잡아먹어라~'하면서 당하고 있을 것 같아?! 내가 순순히 묶일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다 잡아먹어버릴테야!!]


놀란 신들이 뒤로 물러섰다. 펜리르와 신들사이에  적막과 살기가 맴돌았다. 


- 펜리르 묶기, 게버.H.A 그림(1909. 출처 : https://www.worldhistory.org/image/14507/fenrir-bound/)


서로를 한참 노려보던 중 신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이 끈을 풀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시 풀어줄께.]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펜리르가 다시금 매섭게 으르렁거렸다. 다시 펜리르와 신들사이에 적막과 살기가 맴돌았다. 서로를 한참 노려보다 이번에는 펜리르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날 다시 풀어주겠다고 맹세해! 그리고 그 증거로 내가 끈을 푸는 동안, 너희들 중 하나가 내 입에 손을 넣고 있어야 해. 이 조건을 들어준다면 내가 그 끈을 한번 끊어보겠어!]


펜리르의 말이 신들은 머뭇거렸다. 펜리르는 묶이겠지만, 손을 넣은 자는 손을 잃게 될 것이다. 펜리르를 묶는 댓가로 손이 잘려나가고 싶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펜리르는 이 겁쟁이 신들을 비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내가 하겠어!]


펜리르와 신들이 모두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왔는지 티르가 호숫가에 서있었다. 티르를 본 신들은 어쩔줄 몰라 식은땀만 흘렸다. 펜리르를 이대로 둘 수도 없었지만, 오딘의 아들인 티르를 펜리르의 아가리에 들이밀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티르는 호수를 건너 신들 사이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티르가 펜리르의 앞에 섰다. 난감하긴 펜리르도 마찬가지였다. 원수의 아들이지만, 어쨌건 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상대 준 것은 티르뿐이었다. 모두가 어쩔줄 모른채 멍하게 있자, 티르는 펜리르의 입을 벌려 자신의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펜리르, 내 손이 증거야.]


 티르와 눈을 마주친 펜리르는 이내 티르의 손목을 입으로 물었다. 이젠 되돌릴 수 없다. 머뭇거리던 신들이 글레이프니르로 펜리르를 묶기 시작했다. 그동안 티르와 펜리르는 서로 시선을 맞췄다. 펜리르는 티르의 눈을 보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신들은 분명히 무언가 노림수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 끈은 끊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조건을 이 겁쟁이에, 비겁한 신들은 도저히 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티르가 나타났다. 티르는 순수했고, 신들이 하는 말을 믿었다. 티르는 기꺼이 오른손을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자신에게 먹이를 가져다 주던 어린 신. 서로 말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호수 양쪽에서 시선을 나누던 날들. 티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티르가 먹이를 가져다 주는 것이 오딘의 명령이었는지는 알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던 티르에게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을 뿐. '친구'. 어쩌면 그렇게 불러볼 수 있을 유일한 존재. 펜리르는 이 순간을 저주했다. 그때 티르가 말했다.


[펜리르. 이제 끈을 끊어.] 


어느새 신들이 글레이프니르로 펜리르를 꽁꽁 묶었다. 티르의 눈은 너무도 맑고, 순수했다. 펜리르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온 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끊겨라!)]


펜리르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원수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티르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어느새 펜리르는 있는 힘껏 글레이프니르를 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끈은 더욱 조여올 뿐, 어느샌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펜리르는 마지막 힘을 짜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결국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모든 힘을 소진한 펜리르는 털썩 쓰러졌다. 그때 펜리르의 귀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티르!]


- 티르의 오른손


펜리르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누군가가 티르를 안아올렸다. 그는 티르를 품에 안은 채, 정신없이 호수를 건너 숲 밖을 향해 달렸다. 그의 몸 한쪽으로 축 늘어진 티르의 오른팔이 흔들렸다. 티르의 오른팔은 갈갈이 찢겨지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티르의 오른쪽 손목은 보이지 않았다. 펜리르는 그제서야 자신의 입안에 무언가 남아있음을 알았다. 티르의 오른손은 처음 넣었던 그 상태로 펜리르의 입안에 남았다. 티르가 숲 밖으로 사라지고, 펜리르의 곁으로 신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 펜리르는 치를 떨었다. 신들의 말을 믿은 티르가 오른손을 잃었는데도 걱정하기는 커녕, 자신을 묶은 것에 환호하는 신들의 모습에 펜리르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이제 펜리르는 묶였고, 더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신들은 펜리르를 이리저리 찔러보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며 한참동안 그를 조롱했다. 신들은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를 가져와 단단한 말뚝을 박았다. 말뚝에 튼튼한 쇠사슬을 걸고, 글레이프니르의 끝을 쇠사슬에 연결했다. 그런 다음 바위를 땅속 깊이 묻었고, 그 위로 더 무거운 바위를 쌓아올렸다. 이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은 신들은 펜리르의 입을 벌리고, 크고 날카로운 칼로 빗장까지 걸었다. 펜리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와 침이 고여 '반(Wan/Van : 희망)'이라는 이름의 강이 되어 흘렀다. 신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펜리르는 이제 신들의 조롱꺼리가 되었다.


 민회의 신이자, 맹세의 신인 티르는 맹세에 필요한 오른손을 잃었다. 펜리르는 자신의 평생에 유일하게 따뜻했던 기억을 지웠다.  펜리르는 신들을, 아버지를, 어머니를 저주했다. 세상 모든 것을 저주했고, 무엇보다도 운명을 가장 저주했다. 펜리르는 그 모든 것을 저주하며, 반드시 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리라 다짐했다.


신들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펜리르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펜리르는 더이상 두려움도, 흥미도 주지 못했다. 그냥 귀찮고, 잊어버리게 된 그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버려지고 잊혀진 펜리르는 아주 가끔, 낯설지 않은 냄새를 느꼈다. 펜리르에겐 이미 잊은 냄새였지만. 펜리르는 오직 복수 만을 생각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온다면.




흔히 신화 속에서 신은 전지전능하며, 가장 강력한 존재다. 그에 비해 북유럽 신화 속의 신들은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 속의 신들도 분명히 강하고, 많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절대적이진 않다. 또 북유럽 신화 속의 신들은 무언가 부족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을 상징하는 키워드와 배치되는 경우도 흔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딘티르일 것이다. 오딘은 '지식과 지혜의 신'이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여겨진다. 오딘의 지식과 지혜 역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후천적으로 학습에 의해 습득한 것들이다. 그런 오딘에겐 한쪽 눈이 없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지식을 지녔다고 해도 한쪽 눈으로, 모든 것의 한쪽 면만 보며 판단한 지혜가 과연 언제나 올바를 수 있을까? 용감한 신, 티르는 결투의 신이고, 민회와 맹세의 신이다. 검을 잡고, 맹세를 하며 들어올리는 손인 오른손. 티르에겐 그 오른손이 없다. 이런 모습은 앞서 말한 두 신 이외에도 많은 북유럽 신화 속 신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일종의 '아이러니(irony : 역설, 부조화)'다. 하지만 그래서 북유럽 신화 속의 신들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 북유럽신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이 가장 강력한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심지어 신도 죽는다. 그렇기에 북유럽신화의 신들은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한다. 때로는 거인을, 때로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끝', '마지막', '죽음'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대체로 '트로이 전쟁'을 기점으로) 영웅들의 서사로 바뀌고 신들은 자연스럽게 퇴장한다. 그에 비해 북유럽신화는 대부분의 신들이 죽으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북유럽신화 속의 신들을 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운명'이 있다.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마치 강처럼 흘러간다. 오딘을 비롯한 그 어떤 신도 운명의 흐름은 거부할수도, 바꿀수도 없다. 신도, 거인도.. 심지어 이미르나 수르트 조차도 모두가 운명의 흐름 위에서 춤을 추고, 연기를 하는 연기자일 뿐이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운명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로키가 낳은, 파멸을 부르는 세 아이도 이 흐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쩌면 오딘이 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운명은 그들이 죽을 곳을 이미 정해놓았기에, 오딘은 죽이고 싶어도 죽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언젠가 운명에 대해 한 일본 작가가 적은 글이 생각이 났다. 우리는 '운명(運命)'이라는 찻잔에 담긴 물과 같다. 그리고 운명은 '숙명(宿命)'이라는 탁자 위에 있다. 숙명은 '천명(天命)'이라는 방 안에 있다. 숙명은 천명 밖으로 나갈수 없지만, 천명의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 위치와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또한 운명은 숙명의 밖으로 나갈수 없지만, 숙명의 안에서는 얼마든지 그 위치나 형태를 바꿀 수 있다. 그 작가는 벗어날 수는 없지만, 변화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작가의 이야기에서도 정작 중요했던 건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숙명, 때로는 천명의 틀 안에서는 움직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운명이라는 찻잔의 크기와 형태는 바뀌지 않으니까. 운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신보다도 강한 것인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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