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리가 편지를 쓰는 동안 스튤라는 한가롭게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스노리가 편지를 접었다. 그때 스튤라가 물었다.
스튤라 : 아저씨, 저기 울타리 아직도 손보지 않으신거예요? 길가 쪽 말고도, 개울가 쪽이랑, 저기 숲 옆 울타리도 무너진 것 같은데요?
스노리 : 아, 그거. 사람 불러야지.
스노리는 편지를 봉투에 넣으며 대답했다. 스튤라가 코를 찡긋거렸다.
스튤라 : 잉.. 지난번에도 손봐야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스노리 : 내가 좀 바쁘잖니. 이거 말고도 또 편지를 보내야 할 곳이 수두룩하단다. 의장이라는게 쉬운게 아니야. 어디 좋은 솜씨를 가진 일꾼이 없으려나.. 아스가르드 성벽을 고친 일꾼이라도 불러야 하나..
스노리가 밀랍을 녹여 편지를 봉했다.
스튤라 : 에? 아스가르드 성벽도 무너졌었나요?
스노리: 그럼. 신들의 전쟁 때 무너졌지.
스노리의 대답을 들은 스튤라가 다시 물었다.
스튤라 : 그건 미드가르드의 성벽이 아닌가요?
스노리 : '구전(口傳 :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에 따라 다르단다. 미드가르드의 성벽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스가르드의 성벽이라고 하기도 하지.
#. 떠돌이 석공
오늘도 헤임달은 부하들을 데리고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따라 순찰을 돌았다. 성벽이라고 하지만 곳곳이 무너져내려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반 신족과의 전쟁으로 무너진 성벽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간이 없었다기 보다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런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보고 있노라면, 헤임달은 늘 기분이 언잖았다.
[거인이라도 쳐들어오면 큰일이건만..]
아스가르드는 신들의 거주지. 경비나 방어의 취약도 문제였지만, 신들의 거주지를 지키는 성벽이 이 모양이라는 건 신들의 위신에도 문제가 있었다. 지금껏 성벽을 보수해달라고 여러번 건의를 했지만,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기는 헤임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헤임달은 더욱 경비에 신경을 썼다. 언제나 부하들에게도 힘을 주어 강조했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은 저 돌무더기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아스가르드의 최전선이고, 우리가 아스가르드의 마지막 방벽이다.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면, 오딘의 침실마저 적들의 발아래 놓일 것이다. 결단코! 개미 새끼 한마리도 놓치지 마라!]
헤임달의 부하들도 현실를 잘 아는지라, 헤임달의 말이 반복되어도 결코 허투루 듣지 않았다. 헤임달은 부하들과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도 이미 무너져 문기둥의 일부만 남았다. 정문의 건너편으로 아스가르드로 걸어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비프로스트(Bifrost : 희미하게 빛나는)'가 있다. 이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다리는 신 또는 그에 필적할 만한 자가 아니고서는 걸을 수 없었다. 헤임달이 가장 신경쓰는 곳이었고, 자신의 저택인 '히민뵤르그(Himinbjorg : 천상의 성)'를 정문 옆에 짓기까지 했다. 헤임달은 언제나 이곳에서 부하들을 점고했다. 부하들에게는 성벽 순찰을 계속하게 한 뒤, 헤임달은 비프로스트를 감시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였다. 마침 부하들을 점고하던 헤임달에게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헤임달은 비프로스트로 시선을 돌렸다.
- 비프로트, 아서 래컴 그림(1910.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비프로스트)
비프로스트 위를 누군가 걷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피부, 밀짚모자와 농부의 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가 삐쩍마른 말 한필과 함께 비프로스트를 건너오고 있었다. 헤임달은 부하들에게 경계를 명하고, 그 사내를 좀 더 지켜보았다. 비프로스트를 건너온 것은 그 사내와 말 뿐이었다. 그 사내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뒤를 따르는 것은 아닌지 더 멀리까지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헤임달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말에게 풀을 먹이러 나온 목동처럼 한가로웠다. 비프로스트를 건너온 사내는 말을 풀어 풀을 뜯게 했다. 그런 다음 모자로 얼굴을 덮으며 무너져 내린 성벽 더미 한 켠에 드러누웠다. 헤임달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인간은 물론, 어지간한 자는 비프로스트를 걸어서 건널 수 없었으니까. 분명 저 사내와 말은 보통의 거인이 아닐 것이지만, 싸우고자 온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헤임달은 사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넌?]
[나요? 그저 떠돌이 석공이죠.]
사내가 대답을 하며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햇볕에 그을리고 거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임달은 맞은 편 돌더미에 앉았다. 사내는 다시 모자로 얼굴을 덮었다. 잠시 사내를 지켜보던 헤임달이 물었다.
[용무는?]
[나리는 뉘신데요?]
사내가 누운 채로 대답했다. 헤임달은 기가찬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 이 동네 문지기.]
그러자 사내는 얼굴에 얹어 둔 모자를 벗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공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러셨군요. 진작에 말씀하시지. 저는 여기 오면 일꺼리가 있다고 해서 왔습죠. 제가 어려서부터 돌쟁이로 살아서 돌을 좀 만집니다. 여기 성벽 때문에 이 동네 분들이 골치아파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죠.]
헤임달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지?]
[그러문입죠. 신들이 사는 동네라죠? 저 같은 놈들이야, 벌어먹을 일이 있다면 그게 어디든 가니까요.]
사내가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헤임달이 표정을 풀며 말했다.
[(보통 놈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름난 거인일테지. 싸우러 온 것은 아닌 듯 하지만, 무언가 꿍꿍이가 있겠지. 그걸 알아내는 게 우선이다.) 흠.. 그래? 너도 보다시피 저 성벽 때문에 골치를 좀 썩이고 있긴하지.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헤헤. 저는 석공이라니까요. 그리고 벽을 세우고, 집도 잘 짓습니다. 지금껏 이걸로 벌어먹고 살아왔으니까요. 제가 저 성벽을 다시 세워드립죠. 이전처럼, 아니. 더 크고 딴딴허게 세워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까만 얼굴과는 달리 하얀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헤임달도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맨 입으로 해줄리는 없고. 원하는게 있겠지?]
[에이.. 그걸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죠. 그래도 이렇게 큰 공사인데, 이건 집주인과 사는 분들을 만나뵙고 말해야죠~]
헤임달의 물음에 사내가 헤임달 앞으로 한발짝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헤임달이 경계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지만, 사내는 여전히 굽실거리는 자세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사내를 보던 헤임달이 가만히 일어섰다.
[안에 알리겠다. 기다려라.]
[예예~ 여기 얌전히 앉아서 나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헤임달은 몸을 돌려 정문으로 돌아왔다.
[저 자를 잘 감시해라. 저 자리를 이탈한다면 죽여도 된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헤임달은 긴다리로 성큼성큼 발할라를 향했다. 헤임달이 사라지자, 사내는 다시 드러누워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사내는 이내 코를 골았고, 그의 말은 사내의 주위를 돌며 풀을 뜯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작은 새들의 노랫소가 들렸다. 더없이 한가로운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