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무너진 성벽 더미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사내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신들은 더 영악했다. 특히, 로키라는 녀석은 이가 갈릴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로키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계약을 맺었다. 계약은 계약이다. 사내의 머릿 속은 이내 낮에 본 프레이야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아주 잠깐 스치듯 본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화가 난 표정을 짓던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프레이야는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아니,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해와 달은 그저 구실일 뿐. 프레이야. 보는 순간, 세상 모든 존재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프레이야. 그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건 충분히 해볼만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이것이 사내에겐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사내가 프레이야를 생각하며 이리저리 뒤척이는 동안, 성문 자리 옆에서는 헤임달과 부하들이 사내를 지켜보았다.
- 거인과 스바딜파리, 로버트 앵글 그림(1919,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va%C3%B0ilfari)
다음날 사내는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끝냈다. 자신의 애마인 '스바딜파리(Svaðilfoeri : 불운의 여행자)'에게도 이미 배불리 먹이를 먹였다. 아침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며, 사내는 스바딜파리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지만, 사내는 기운이 넘쳤다. 프레이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내는 피곤함을 잊었다. 아침해가 떠올랐다. 사내는 스바딜파리의 고삐를 잡고, 힘차게 첫걸음을 내딛었다. 겨울이 시작하는 아침, 드디어 아스가르드 성벽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신들은 저마다 공사장을 찾았다. 신들은 사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일은 제대로 하는지, 그리고 계약대로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이 놀라움이 되고, 놀라움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내가 일하는 모습은 신들을 기가차게 만들었다. 일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신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랑할 만했다.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일하는 속도였다. 시작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무너진 성벽더미가 사라졌고, 부서진 성벽의 철거도 끝냈다. 다시 며칠이 되지 않아 기초작업이 끝났고, 성벽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한 겨울의 차가움도 사내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도 경악스러웠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사내가 데리고 온 말이었다.
스바딜파리는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니었다. 삐쩍말라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마였다. 스바딜파리가 하는 일은 사내의 두배 몫을 하고도 남았다. 그 많고, 무거운 돌을 실어날라도 다리가 휘청거리기는 커녕,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내도, 스바딜파리도 편하게 쉬는 법이 없었다. 스바딜파리가 일하는 동안 사내가 잠시 쉬고, 사내가 일하는 동안 스바딜파리가 잠시 쉬는 정도였다. 대체 잠을 자기는 하는건지 알수 없었다.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더 기운이 나는 듯 여겨질 정도였다. 스바딜파리가 채석장으로 부터 돌을 날라 작업장으로 가져오면 사내가 돌을 다듬고, 조각해서 훌륭한 자재로 만들었다. 스바딜파리가 이 자재를 작업장에서 현장으로 나르면, 사내가 현장으로 와서 성벽을 쌓아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약속한 공사의 마감 기간을 얼마 앞 둔 어느날. 신들은 다시 글라드스헤임에 모였다. 모인 신들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여섯달. 도저히 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스가르드의 성벽은 마무리 공사에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마감 기간이 되기 전에 성벽 공사는 끝날지도 모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저 사내를 죽였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신들이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지만, 누구 하나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제와서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다. 계약은 계약, 그것도 신들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해와 달, 그리고 프레이야를 사내에게 넘겨줘야 한다. 프레이야는 며칠째,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프레이야는 침대에 쓰러져 매일을 울며 보냈다. 신들에 대한, 특히 오딘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으로 몸을 떨며 울었다. 그녀가 흘린 황금눈물이 온 침대를 적셔 침대가 황금으로 변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신들은 더욱 침울해졌다. 특히 오딘은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거칠어진 얼굴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오딘과 신들의 분노가 온전히 로키에게로 향했다.
- 오딘과 로키
난감하긴 로키도 마찬가지였다. 계책을 세우고, 계약을 할 때까지만해도 모든 것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사내도, 신들도, 프레이야도 모두가 자신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키의 계산 착오였다. 모두 예상하듯, 사내는 거인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이름난 거인.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힘이 좋은 거인이어도 여섯달 동안 아스가르드의 성벽 공사를 완성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로키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했다. 프레이야를 안심시키려고 별 생각없이 했던 그 말이 자신의 발 밑에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하지만 로키는 역시, 로키였다. 언제나 그랬듯, 로키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방법을 찾아냈다. 홀 한가운데에서 한동안 신들이 퍼붓는 악담을 듣던 로키가 갑자기 손을 치켜들었다.
[잠깐! 지금 나한테 다 떠미는거야?! 너무들하네.. 그래, 내가 책임진다고 말했어. 근데 그 전에 내 계책이 마음에 든다고 노래를 부르던 건, 대체어디 사는 누구들이었지? 다같이 모여서 결정해놓고, 이제와서 책임은 나한테 떠넘기면 다 해결되는거냐고!]
로키의 항변에 오딘도, 모여있던 신들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로키는 주변에 모인 신들을 하나, 하나 노려보았다.
[난 누구들과는 달라! 난 로키라고! 내가 책임지고, 이번일은 어떻게든 수습하지! 그러니 너무 닥달하지 말란 말이야!]
말을 마친 로키는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아무도 로키를 잡지 못했다. 오딘도 그저 로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로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함께 결정했으면서, 막상 일이 틀어지자 아무것도 못했다. 한다는 게 고작 로키에게 책임을 떠넘겼을 뿐. 신들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이는 오딘도 마찬가지였다. 오딘도 자신이 평소와 달리 냉철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이대로는 프레이야에 정신이 팔린 호색한 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