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력은 헛되이
한동안 로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도망갔다고 생각하는 신은 없었다. 아무리 사고뭉치 로키라 해도, 신들에게 그 정도의 신임은 얻고 있었다. 신들이 회의를 거듭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행을 떠났던 토르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계약을 파기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토르가 있으니 일단 수습은 가능할 것이다.
시간은 흘러, 마침내 약속한 여섯달의 마지막 하루가 남았다. 아스가르드의 성벽 공사도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정문으로 쓸 성문을 제외한 모든 공사가 끝났다. 사내는 손으로 성벽을 쓰다듬었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은 더없이 높고, 웅장했으며, 또 견고했다. 이 성벽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사내가 그동안 만든 그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제 정문에 성문을 달면 끝이다. 사내는 서둘러 스바딜파리를 채석장으로 보내고, 정문 기둥 장식을 손질했다.
[성문만 달면, 이 고생도 끝이다. 이제 프레이야는 내꺼라고. 이 성벽은 영원히 남을 최고의 지참금이 될테지. 정말 힘들었어.. 정말..]
사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사내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내가 지금 무슨.. 이럴 때가 아니지. 이제 정말 얼마 안남았어. 정신차리고, 집중하자.... 근데 내가 프레이야를 데리고 나타나면 다들 뒤집어지겠지? 하하!]
- 스바딜파리, 도로시 하디 그림(1909.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va%C3%B0ilfari)
한편, 스바딜파리는 채석장에서 성문으로 쓸 커다란 돌을 실었다. 이것이 마지막 돌이다. 공사가 끝나가는 것을 아는지 스바딜파리의 발굽소리도 경쾌했다. 채석장을 떠난 스바딜파리의 앞을 한마리 아름다운 암말이 가로막았다. 순간 스바딜파리는 다리가 얼어붙은듯 그자리에 완전히 멈춰섰다. 사내가 프레이야에게 반하듯, 스바딜파리는 이 눈송이처럼 하얀 암말에게 순식간에 반해버렸다. 스바딜파리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을 때, 암말은 천천히 스바딜파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곁으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암내를 피우자, 스바딜파리는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스바딜파리는 싣고있던 돌을 내던지고, 암말에게 덤벼들었다. 암말은 스바딜파리를 계속 유혹하며 숲 속으로 향했다. 참을성을 잃은 스바딜파리에게 주인인 사내도, 아스가르드의 성벽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바딜파리는 암말을 뒤쫓아 숲 속을 달렸다. 암말과 함께 이 숲, 저 들판을 함께 달리며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작업장에서 스바딜파리를 기다리던 사내는 속이 탔다. 이미 돌아와도 한참 전에 돌아왔어야 했다. 지금 즈음에는 성문을 달고 있어야 했다. 이제 곧 끝인데, 성문으로 쓸 마지막 돌을 가져와야 할 스바딜파리가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비프로스트 앞에서 서성대기를 한참..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더 기다릴수 없다고 생각한 사내가 비프로스트를 건넜다. 채석장으로 향하던 사내의 눈에 어지럽게 찍힌 말굽 자국들이 보였다.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사내는 말굽 자국을 따라 달렸다. 이 숲에서 저 들판으로, 다시 그 넘어 숲으로.. 그러는 동안 한밤중이 되었다. 사내는 정신없이 스바딜파리를 찾았지만, 밤은 말굽 자국을 지워버렸다. 사내는 급한 마음에 채석장으로 향했다. 돌을 지고날라서라도 어떻게든 아침이 되기 전에 성문을 완성해야 했다. 사내의 눈에 스바딜파리가 던져버린 돌이 조각난 채 널부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았다. 성문으로 사용할 돌이었다. 이렇게 큰 돌은 쉽게 구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조각나버렸다. 이미 새벽이었다. 대체 어디서 성문으로 쓸 돌을 구한다는 말인가.. 그때 사내의 뒷쪽에서 힘없는 말굽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사내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스바딜파리였다. 사내가 미처 화를 내기도 전에 스바딜파리는 힘없이 그자리에 쓰러졌다. 사내는 황급히 스바딜파리에게 달려가 스바딜파리의 머리를 받쳤다. 사내가 알고있던 스바딜파리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바딜파리의 가죽은 뼈에 달라붙었고, 두 눈은 뿌옇게 흐려졌다. 스바딜파리는 온 몸의 모든 기운을 다 소진한 것 같았다. 스바딜파리가 사내의 품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채석장의 깎아진 비탈면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해는 어느새 하늘의 가운데를 향해 달려갔다. 사내는 스바딜파리의 머리를 가만히 땅에 내려놓았다. 사내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해와 달, 프레이야 그리고 스바딜파리. 모든 것이 사라졌다.
[.. 프레이야?]
중얼거리던 사내가 갑자기 미친듯 웃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그녀였다. 프레이야를 가지겠다는 사내의 욕망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았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먹지 말았어야 했던 것인가? 정당하게 프레이야를 가지겠다던 마음이 그렇게나 사치였던 것인가? 아니, 이건 신들의 농간이다. 애초에 신이라는 것들은 믿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었다. 자신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신들은 이렇게 비열한 꼼수를 부렸다. 사내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남은건 하나 뿐이었다. 약속을 깬 저 비열한 신들을 응징하고, 프레이야를 전리품으로 끌고오는 것. 사내는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며 거대한 거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인은 곧바로 아스가르드로 향했다. 거인의 고함소리가 숲과 들판을 지나, 비프로스트를 넘어 아스가르드까지 크게 울렸다. 거인의 눈도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킬듯 이글거렸다. 이른바 '요툰모드(Jotunnmoðr : 거인의 분노)'로 불리는 거인의 폭주였다.
누군가 비프로스트 위에 서서 거인의 모습을 내려보았다. 토르였다. 신들은 해질 무렵부터 한밤중이 될 때까지 사내가 보이지 않자, 로키가 무언가 일을 벌였음을 직감했다. 오딘은 곧바로 토르를 불러 다음 일을 준비시켰다. 아침해가 뜨자, 토르는 묠니르를 들고 비프로스트로 나가 거인을 기다렸다. 토르에게도 분노한 거인이 아스가르드를 향해 폭주열차처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토르를 발견한 거인이 소리쳤다.
[난 약속을 지켰다! 너희를 위해 동족까지 속여가며 그 고생을 했다! 정당한 땀의 댓가가 고작 이것이더냐! 너희 년놈들을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죽여버릴테다!!]
토르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토르가 비프로스트 넘어로 날아올랐다. 번쩍이는 섬광과 무시무시한 굉음이 하늘을 뒤덮었다. 묠니르가 토르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거인은 머리가 짖이겨진 채 비프로스트 앞 미드가르드의 대지에 그 거대한 몸뚱이를 맡겼다.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씁쓸하군. 그러나 계약은 계약이다.]
토르는 몸을 돌려 비프로스트를 걸어갔다. 신들이 아스가르드의 성벽 위로 올라와 환호했다. 거인의 시체는 지옥으로 던져졌다. 신들은 크고 아름다운 성문을 만들어 달았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이 완공된 것을 기념하는 흥겨운 연회를 열였다. 신들은 지신들과 아스가르드를 지켜줄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벽을 얻었다. 그것도 큰 힘을 들이지않고.(마음고생이야 했을지는 몰라도) 해와 달 그리고 신들의 소중한 프레이야 모두 무사하다. 신들 모두 흥겹게 먹고, 마시고, 노래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직 오딘과 토르, 두 신만은 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그때 헤임달이 달려와 신들에게 로키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오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입구까지 달려내려갔다. 로키가 망아지 한마리를 연회장 앞에 묶어놓은 뒤 연회장 입구로 들어왔다. 고생을 심하게 했는 지, 로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딘이 로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핼쑥해진 모습의 로키가 오딘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정말 고생했다. 나 오딘은 너의 노고를 잊지않을 것이다. 반드시 기억하겠다.]
오딘은 로키를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갔다. 그 모습을 본 신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로키를 외쳤다. 로키가 손을 들어 인사하며 신들에게 답례를 대신했다. 오딘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마시며, 연회를 즐기던 로키가 오딘에게 말했다.
[당신과 신들의 환대에 감개가 다 무량하네요. 아, 깜빡한 게 있어요. 당신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오딘이 궁금해하며 묻자, 로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연회장 앞에 잿빛 망아지 한마리를 묶어놓았습니다. 일전에 보셨던 스바딜파리의 자식이죠. '슬레이프니르(Sleipnir : 미끄러지듯 달리는 것)'라고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생긴게 조금 요상하긴 하지만, 다 자라면 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빠를 겁니다. 받아주실꺼죠?]
[물론이지! 내 의형제의 선물인데 그게 무엇이건 기꺼이 받아야지. 이번에 너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맙다. 로키.]
오딘은 술잔 가득 술을 따라 로키에게 건넸다. 로키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연회장은 밤이 새도록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슬레입니르는 오딘의 마굿간으로 옮겨졌다. 온 몸은 잿빛으로 빛났고, 다리는 여덟개나 달려있었다. 슬레입니르는 로키가 말한 것 보다 더 훌륭하게 자랐다. 슬레입니르는 오딘의 애마가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오딘과 함께했다.
- 슬레입니르, 섕바이드 암각화(스웨덴.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leipnir)
앞서 공사를 중지시킨 것은 역시 로키의 계책이었다. 공사를 중지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로키가 선택한 것이 스바딜파리였다. 스바딜파리는 사내의 두배이상의 몫을 하고 있었고, 모든 자재를 운반하는 것도 스바딜파리였다. 스바딜파리를 멈추게 한다면, 사내도 작업을 멈출 수 밖에 없다. 스바딜파리를 유혹한 암말은 로키가 변신한 것으로, 로키가 짜낸 '고육지책(苦肉之策 : 자신의 몸을 괴롭히면서까지 꾸며낸 계책)'이었다.
한바탕 아스가르드를 휘저었던 소란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신들은 해와 달도 내주지 않았고, 프레이야도 지켰다. 아스가르드의 성벽은 이전보다 더욱 견고해졌고, 오딘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까지 얻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던들 어떤가? 손해 본 것도 없고, 끝이 좋으니 다 좋은 것이다.
#PS1
지난 번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북유럽신화를 보면, 이따금 신보다 강한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단적으로 불꽃의 민족, 무스펠을 다스리는 수르트만 해도 신보다 강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수르트마저도 넘는 더욱 강한 존재에 대한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지난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운명'과 몇 편에 걸쳐 등장한 '계약'과 '약속'이 그렇다. 신은 물론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운명'과 '계약', '약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운명은 수르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인다. 북유럽 신화의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수르트는 존재했음에도,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다가 라그나로크가 되어서야 등장해 운명이 이끄는대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계약과 약속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신으로서의 위신이나 체면 때문 만은 아닌 것 같다. 신도 계약과 약속을 마치 불문율처럼 대한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신들은 거인을 원하는대로 이용하고 죽이면 그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긴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들은 계약과 약속에 묶여 어쩔줄 모른다. 신들의 입장에서 거인은 적이다. 굳이 신용이나 신뢰를 지킬 사이도 아니다. 북유럽 신화 속에서 신들이 명분이나 실리 앞에서 태세를 바꾸는 일은 흔하다. 특히 오딘은 신들 중에서 가장 '표리부동(表裏不同 : 겉과 속이 다름)'한 신이다. 그런 오딘마저도 계약과 약속에 묶이면 당황하곤 한다. 신화라고 하면, 신이 이미 최상위가 아니던가? 그런 신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력해지는 것인가? 과연 신들보다 강한 존재. 그 정체는 무엇일까?
#PS2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지은 사내, 즉 거인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거인족이라는 것 밖에는요. 하지만 반년만에 신들도 엄두를 못내던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모두 지은 것을 보면 힘도, 능력도 대단한 거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스바딜파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암말(로키였죠?)을 따라가 그대로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화가 난 거인의 앞에 터덜터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거인의 분노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스바딜파리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로키가 직접적으로 죽였다기 보다 오랜 공사기간을 비롯한 다양한 이유로 모든 기운을 소진한 스바딜파리가 거인의 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점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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