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집으로
오늘도 아스가르드는 평화로웠다. 그건 발할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딘은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한가로이 세상을 구경했다. 잠시 미드가르드에 마실을 다녀왔지만, 역시나 무료해 보였다. 오늘 오딘의 곁에는 프리그도 함께였다. 그녀는 자신의 시녀들과 둘러앉아 구름양털을 고르고 있었다. 세상을 보는 게 지겨워졌는지, 오딘은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오딘이 말했다.
[여보, 프리그. 그거 재미있어?]
[흠.. 글쎄요?]
프리그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딘은 프리그가 구름양털을 고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말했다.
[여보, 프리그.]
[.. 왜요?]
프리그가 다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신 그러고 있으면, 목이 마르지 않아?]
[음.. 당신 목말라요?]
프리그가 오딘을 보며 물었다. 오딘이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를 해야죠. 풀라, 가서 시원한 벌꿀술을 가져오렴. 잔은 두 잔. 아, 아니다. 너희 먹을 것도 가져오렴. 모처럼 다 같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도록 하자꾸나.]
풀라가 다른 시녀들과 함께 벌꿀술과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프리그는 다시 구름양털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오딘이 말했다.
[음.. 모처럼 정원에 나가서 먹을까? 오늘 햇살도 좋은데.]
프리그가 오딘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웬일이래요? 모처럼이니.. 그럴까요?]
프리그가 환하게 웃었다. 프리그는 게이로드의 일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내색하지 않았다. 프리그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프리그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오딘은 생각했다. 역시 프리그는 웃을 때가 제일 매력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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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01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프리그(Frigg : 사랑하는)'는 종종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Hera : 영웅, 선택되다)'에 비교되곤 한다. 신화 속에서의 위치와 관계, 그리고 상징성 등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프리그와 헤라 모두 남편이 '신들의 왕'이며, 자신은 정실부인으로서 '신들의 여왕'과도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신들의 왕의 아내이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을 떼어놓고 보아도 그녀들 스스로의 힘과 능력만으로 충분히 이 지위에 오를만한 여신들이다.
또한, 그녀들의 남편들은 둘 다 바람둥이로 유명하다. 오딘과 제우스는 상대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 사이에서 실제로 많은 자식을 보기도 했고. 이로 인해 프리그와 헤라 모두 골치를 앓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들의 왕이 한수 숙이고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프리그는 이번 이야기에서 처럼 한동안 지켜보다가 한 번씩 꾀를 내어 오딘이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헤라는 애초에 제우스의 누나이며, 제우스와 결혼하면서 내건 조건이 있기 때문에 제우스는 종종 헤라에게 잡혀 산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 프리그와 풀라, 루드비히 피에취 그림(186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Frigg)
프리그와 헤라는 둘 다 '사랑과 가정, 결혼'에 관여하는 여신이다. 신들의 어머니로서 위치를 지니는 여신은 대체로 '대지'나 '가정'이라는 상징을 지닌다.(물론 두 가지를 모두 가진 경우도 있지만) 프리그와 헤라는 '가정'이라는 상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들이 여신,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정은 세상과 사회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이자, 그 바탕과도 같은 조직이다. 그 기본 바탕이 튼실해야 세상과 사회가 유지되고, 바르게 작동할 수 있다. 고대부터 가정을 튼실하게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어머니라고 여겼다.(어쩌면 모계사회의 가치가 남은 형태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신들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가정이 신들의 어머니가 지니는 상징이 되었다.
어쩌면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이것을 여성 혐오나 여성 차별이라고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을, 그리고 프리그나 헤라를 낮게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정은 소중한 것으로 여겼고, 그렇기에 신들의 어머니, 신들의 여왕 만이 가질 수 있는 상징이 된 것이다.
- 헤라의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 소장(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era )
프리그와 헤라는 각자의 신화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미의 여신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 탑 3'라고 하면, '프리그', '프레이야', '시프'를 말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 탑 3'라고 하면,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를 말한다. 각각 미와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불리는 '프레이야'와 '아프로디테'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언제나 '프리그'와 '헤라'다. 이는 그녀들이 단순한 외적으로, 또는 성적으로서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는 다른 매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프리그와 헤라는 신들의 왕, 최고신의 아내이지만 그 성격이 좀 다르다. 프리그는 오딘의 아내이자, 신들의 어머니라는 상징성이 강하다. 반면, 헤라는 제우스의 아내이자, 제우스의 연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프리그와 프레이야가 뭉치고, 분할되며 프레이야에게 연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옮겨가고, 프리그에게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었다.
#PS 02
여신 '풀라(Fulla/Volla : 충만한, 풍요로운)'는 금빛 머리띠를 두른 여신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프리그에게 마치 여동생 같은 존재이며, 프리그가 자신의 비밀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신뢰하는 존재다. 그녀는 프리그의 기대만큼 프리그에게 충실한 시녀로서 프리그의 '잿빛 상자(Eski)'와 '신발'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풀라는 그 외모나 이름처럼 '풍요'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며, 프리그와 연관되어 '다산(多産)'을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북유럽 신화 특유의 아이러니가 등장하는데, 다산을 상징하는 풀라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신이라는 점이다. 풀라도 처음에는 북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풍요'와 '다산'의 여신으로 섬겼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북유럽 신화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풀라의 역할과 상징이 일부 남아서 프리그의 부속여신이 된 것이다.
- 프리그와 시녀들. W.맥도웰 그림(1902.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Frigg) (- 그림 추가 설명 : 가운데 앉아있는 여신이 프리그, 오른쪽에 말을 타고 있는 여신이 그나, 왼쪽에서 상자를 든 여신은 풀라, 그 뒤에 있는 두 여신은 린과 로픈으로 여겨짐.)
프리그의 시녀 중에는 11명의 여신이 근거리에서 프리그를 모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상위 시녀로 여겨지는 세 명의 여신이 있다. 앞서 말한 '풀라(Fulla)'와 '린(또는 흘린, Lin/Hlin : 지키는, 보호하는)', '그나(Gna : 의미불명)'라는 여신이다.(누누이 말하지만 '3'이란 숫자는 성스러운 수로 여겨졌다.) 앞서 말했듯, 풀라는 가장 가까이에서 프리그를 모시는 역할을 담당한다. 린은 프리그의 명을 받아 누군가를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일설에는 프리그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나는 프리그의 전령으로 갑옷과 창을 들고, '호프바프니르(Hofvarpnir : 말발굽을 던지는 자)'라는 말을 탄 여전사로 그려진다. 그녀는 호프바프니르를 타고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달린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세 여신에 버금가는 시녀로 '로픈(Lofn : 온화한)'이라는 여신이 있다. 그녀는 남녀사이에 관여하여 결혼을 주선하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남녀의 사랑이 뜨겁다면, 로픈이 그에 감동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만 보느라 연결해 줘서는 안 되는 이들을 연결해 줘버리기도 한다.(왠지 로픈이 프리그의 시녀 탑 3에 못 들어가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일부에서는 이 세 여신을 '디제 여신(Die Disen)'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발키리와 달리 그녀들은 각자 행동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낮아 보인다.
#.PS 03
이번 이야기에서도 전체적인 흐름을 위해 조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01. 원전에서는 프리그의 시녀들 중 '풀라'만이 등장합니다. 전 여기에 린과 그나를 추가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기 때문에 프리그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정도로 등장시켰습니다.
-02. 오딘이 게이로드의 아들, 아그나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본 내용에서는 생략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번외 편으로 하여 이번 이야기 끝에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03. 이번 이야기를 쓰면서 왠지 모르게 '맥베스'가 생각이 나서.. 몇 개의 대사로 소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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