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오딘의 전사, 베르세르크
- 흔히 떠올리는 베르세르크의 이미지(출처 : 영화 '노스맨-The Northman' 중에서)
에인헤랴르가 죽은 자로서 신의 전사들이라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신의 전사를 자처한 이들이 있다. 이들은 '베르세르크(Berserkr/berserkir : 곰가죽)'라고 불리는데, 흔히 '곰의 가죽을 뒤집어 쓴 자' 또는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 쓴 자' 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들은 마치 곰의 가죽,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 쓴 것처럼 강하고 용맹한 전사들로서, 베르세르크라고 함은 '아주 용감하고 뛰어난 전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모든 신들 가운데 오딘을 따르는 전사들이다. 살아서는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내는 강력한 전사가 되고, 죽어서는 발할라의 전당으로 들어가 오딘의 전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만큼 이들은 전투에 임함에 있어서 매우 호전적이고, 강력했으며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또한 전장에서 죽는다면 발할라에 들어가 오딘의 전사가 될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 베르세르크가 그려진 석판, 스웨덴 오란드(790년 이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erserker)
이런 성향은 이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악마나 괴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이들을 '광전사(狂戰士)'라고 묘사하기에 이른다. '후퇴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싸우는 모습'이 '미쳐서 공격만 하는 전사'라고 묘사되기에 이른 것이다. 'Berserker-버서커'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유래 된 것이고, 수많은 매체에서 버서커를 이른바 '닥돌(닥치고 돌격)'의 전형으로 묘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들이 호전적이고, 용맹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미친 것도, 싸움 밖에 모르는 바보도 아니다. 이들의 전투방식이 공격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광이 전사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이런 이미지를 지니게 된 것에는 잘못된 정보도 한 몫을 했다. 베르세르크의 광기, "베르세르크의 분노(berserksgangr)"는 환각제나 마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라는 것. 18세기에 살았던 '오드먼(Odmann)'이라는 성직자의 말에서 시작된 것으로, 베르세르크가 '광대버섯'으로 만든 환각제를 복용하고 싸움에 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광대버섯이 환각효과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독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환각효과를 보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광대버섯을 환각효과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것은 시베리아 지역의 무당이었지, 북유럽 지역에 살던 베르세르크가 아니었다. 많은 연구를 통해 현재는 베르세르크가 보였던 '광기'의 정체는, 환각제나 마약이 아니라 종교적인 광신 상태였다고 여겨진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트랜스(Trance : 비정상적인 각성상태)'인 것이다.지금도 우리는 주변에서 종교적인 광신이나 맹신에 빠진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종교의 위치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강했고, 그로 인해 더욱 무섭게 보였던 것 뿐이다.(이런 면에서 보면 '베르세르크'나 '질럿-광신도'나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지만.)
- 라이베리아의 소년병, 손에는 총을 들고 등에는 곰인형을 매고 있다.(출처 : https://namu.wiki/w/소년병)
물론 고대부터 지금까지 전쟁에서 환각제나 마약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현대에 들어서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들이 두려움을 잊기위해 마약에 취해 전투에 임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반군들이 소년병이나 반군들에게 마약을 투여하는 경우는 일상다반사다. 우리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전쟁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전쟁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다. 상식은 무시되고 오직 승리와 생존만이 중요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적인 전쟁은 거의 없었다.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이유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터에서는 코미디라고 불릴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 상식이 되곤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평화가 소중한 것이고, 그렇기에 전쟁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베르세르크는 '흐롤프 크라키(Hrolfr Kraki : 늑대의 영광, 까마귀)'왕과 12명의 베르세르크 이야기다. 흐롤프 크라키는 덴마크의 전설적인 왕으로 전해지는데, 유명한 서사시 '베오울프(Beowulf)'에 등장하는 '흐로드울프(Hroðulf : 역시 늑대의 영광이라는 뜻)'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온화한 성격에 신하를 매우 아끼는 왕이었다. 동시에 매우 용감한 전사였으며, 그 자신도 베르세르크였다고 알려져 있다. '흐롤프 크라키'라는 이름은 일종의 별명이다. 그가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어느날, 흐롤프 왕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뵈크르(Woggr/Vottr : 둘다 의미불명. 12명의 베르세르크 중 한 명인 뵈트르로 여겨지기도 함)'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흐롤프 왕을 말없이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궁금해진 왕이 뵈크르에게 왜 그러는지 묻자, 뵈크르가 말했다.
[전 흐롤프 왕이 북쪽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왠 쬐끄만 '까마귀(Kraki)'가 앉아있네요?]
흐롤프 왕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흐롤프 왕은 자신의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이 대범한 시골청년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흐롤프 왕은 자신을 '흐롤프 크라키'라고 불렀고, 자신의 별명을 지어준 대범한 청년 뵈크르에게 황금반지를 선물로 주었다. 황금반지를 선물로 받은 뵈크르는 이후, 흐롤프 크라키의 가장 충직한 부하 중 한 명이 되었다.
다음은 흐롤프 크라키와 12명의 베르세르크에 대한 이야기다.
웁살라의 왕, '아딜스(Adils : 고귀한 서약)'는 흐롤프의 양아버지였다. 아딜스가 흐롤프의 어머니인 '이르사(Yrsa : 여자 곰)'와 재혼했기 때문이었다.(자신은 '늑대의 영광'이고, 엄마는 '여자 곰'이라니.. 이 정도되면 이름에서 부터 베르세르크라는 티를 팍팍내는 거죠?) 아딜스는 이웃나라의 왕 '알리(Ali : 고귀한 이란 의미로 여겨짐)'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전력은 대등했고,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아딜스는 양아들인 흐롤프 왕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아딜스는 지원군의 댓가로 병사들 모두에게 금을 댓가로 줄 것이며, 흐롤프에게도 세가지 귀한 보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흐롤프도 이웃나라와 대립 중이었기에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내줄 수는 없었다. 고민을 하던 흐롤프는 자신 휘하의 최정예전사인 12명의 베르세르크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이들은 곰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두른 아주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흐롤프의 12명의 베르세르크는 아주 용맹하게 싸웠고, 알리의 군대를 물리쳤다. 아딜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12명의 베르세르크는 아딜스에게 약속대로 댓가를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 12명의 베르세르크에게 각각 3파운드의 황금
- 흐롤프 왕에게 검이 들어가지 않는 투구와 갑옷, 그리고 '스비아그리스(Swiagris : 의미불명)'라는 반지
그러나 아딜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스비아그리스는 아딜스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보물이었다. 12명의 베르세르크는 흐롤프에게로 돌아가 아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을 알렸다. 흐롤프는 약속을 지킬 것을 다시 요구하기 위해, 12명의 베르세르크와 함께 웁살라로 향했다. 흐롤프와 부하들이 웁살라에 도착하자, 어머니인 이르사가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날 밤, 아딜스는 흐롤프와 12명의 베르세르크를 맞이하는 연회를 열었다. 흐롤프는 부하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는데, 연회장에서 어머니인 이르사가 보이지 않았다. 흐롤프는 아딜스가 약속을 지키는 대신 자신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흐롤프는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으나, 아딜스는 이 요구는 무시한 채 연회장 한가운데에 아주 커다란 불을 지폈다. 불이 어찌나 큰지 불길은 흐롤프의 바로 앞까지 번졌다. 그러나 아딜스는 그저 연회를 즐길뿐이었다. 아딜스가 흐롤프에게 말했다.
[흐롤프, 너와 너의 전사들이 아주 용감하다고 들었다. 이 불길이 무섭지 않으냐?]
- 불위를 걷는 흐롤프 크라키와 그의 전사들, 로렌츠 프로리히 그림(1856. 출처 : https://fr.wikipedia.org/wiki/Hr%C3%B3lfr_Kraki)
이 불길에 타죽지 않으려면, 댓가를 바라지 말고 꺼지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흐롤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패를 높이 들고 그대로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12명의 베르세르크도 똑같이 방패를 높이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까짓 불이 뭐가 무섭다는 말인가? 이 궁을 모두 불태워라! 아딜스의 방까지 태워버려라!]
흐롤프가 외쳤다. 아딜스는 연회장에서 도망쳤고, 연회장에 있던 아딜스의 부하들은 모두 불속으로 던져졌다. 흐롤프와 12명의 베르세르크가 연회장을 부수고, 궁에도 불을 붙이려던 그때. 흐롤프의 어머니 이르사가 아딜스가 약속했던 금과 보물들을 가져와 아들과 그의 부하들을 달랬다. 어머니의 간청에 못이긴 흐롤프는 금과 보물들을 챙겨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아딜스는 흐롤프가 금과 보물을 빼았아갔으며, 자신이 치욕을 당했다고 여겼다. 아딜스는 곧장 병사들을 이끌고 흐롤프를 뒤쫓았다. 아딜스는 아직 흐롤프와 부하들이 배를 타기 전에 그를 따라잡았다. 12명의 베르세르크는 그들과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흐롤프는 이 이상의 피를 보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딜스의 군대를 뚫고 돌아갈 자신은 있었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딜스는 자신의 양아버지였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의 왕비로서 그의 궁에 남아있었다. 흐롤프는 사슴의 뿔로 만든 잔에 황금을 가득 채워 길 위에 뿌렸다. 그러자 아딜스의 병사들은 황금을 줍느라 추격을 포기해버렸다. 오직 아딜스만이 흐롤프의 뒤를 쫓았다. 흐롤프는 이번에는 스비아그리스를 길에 던졌다. 가문의 보물인 스비아그리스가 길바닥으로 떨어지자 아딜스도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딜스는 허리를 숙여 창끝으로 길에 떨어진 스비아그리스를 걸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흐롤프가 소리쳤다.
[하하하! 보아라! 스웨덴에서 가장 강한 자가 고작 반지 하나 때문에 몸을 굽히는 꼴이라니! 하하하하!]
- 황금을 길에 뿌리는 흐롤프 크라키, 제니 니스트롬 그림(189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Hr%C3%B3lfr_Kraki)
12명의 베르세르크도 흐롤프를 따라 크게 웃었다. 흐롤프는 아딜스를 조롱하는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아딜스가 스비아그리스를 챙기고 보니 이미 흐롤프와 그의 부하들은 배를 타고 저 멀리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딜스는 붉어진 얼굴로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황금을 '크라키의 씨앗'이라고 불렀다. 이후 흐롤프 크라기의 12명의 베르세르크는 기독교의 12명의 사제와 결합하여 '아더왕과 12명의 기사', '샤를마뉴와 12기사'의 모티브가 되었다.
12명의 베르세르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흐로문드 하르디(Hromundr harði)
- 흐롤프 스코덴디(Hrolfr skjothendi)
- 스비프다그(Svipdagr)
- 바이가드(Beigaðr)
- 흐비세르크 인 흐바티(Hvitserkr inn hvati)
- 하크란그(Haklangr)
- 하르드레필(Harðrefill)
- 하키 인 프래크니(Haki inn frækni)
- 뵈트르 인 미킬라프라디(Vottr inn mikilaflaði)
- 스타롤프(Starolfr)
- 햘티 인 후그푸르디(Hjalti inn hugpruði)
- 보르다 뱌르키(Bodvar Bjarki)
- 스비프다그와 그의 연인, W.G.콜린우드 그림(1907.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vipdagsmal)
이들 중 스비프다그는 무녀(巫女, 또는 마녀-魔女) '그로아(Groa : 성장하는)'의 아들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로아의 아들 스비프다그의 서사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스비프다그의 서사시는 이후 별도로 정리할 예정임)
#PS
왜 '가츠'가 나오지 않냐고 묻지는 말아주시길.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베르세르크와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는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 강력한 전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와는 다르다. (출처 : https://namu.wiki/w/베르세르크(만화) #북유럽신화, #북구신화, #오딘, #토르, #드림바드, #단테, #norsemyth, #dreambard, #dante, #프레이야, #베르세르크, #흐롤프크라키, #12명의베르세르크, #스비프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