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은 지금도 잘 모르지만

어른의 맛이라고나 할까

by 여름호빵

고3 때 각성제 대신 마시곤 했던 여명독서실 1층 자판기 블랙커피의 경악스러운 쓴맛은 한동안 내게 커피에 대한 단단한 오해와 거부감을 만들었었다. 대체 이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걸까? 어른들은 이걸 왜 좋아할까? 그냥 오로지 미각을 파괴시키려고 존재하는 것 만 같았던 자판기 블랙커피.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유행하던 헤이즐럿 커피는 학교 앞 주점 겸 레스토랑에서 치즈라면만 시켜도 나오는 후식이었는데, 비록 흐린 보리차맛 같았지만 자판기 블랙커피에 비하면 호로록 마시기 좋았다. 커피가 이런 맛도 있구나 싶어 제법 마실만 했어도 '내돈내산'할 만큼 좋아지진 않았다. 돌이켜 그때 마신 헤이즐럿 커피맛을 떠올리자면 그 역시 커피에 대한 모독이었지만 적어도 내게 커피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해준 것은 맞다.



2000년 초반에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이 한참 유행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는구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커피가 맛있나? 그때까지도 여전히 내게는 공감할 수 없는 기호의 영역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회사 동료가 사 온 ‘악마의 유혹 프렌치카페’ 카페라테맛을 마시고 눈이 번쩍했다. 아니 커피가 이런 맛이 난다고? 너무 맛있잖아!! 그날부터 거의 매일 프렌치카페를 마셨던 것 같다. (원래 한 가지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먹는 스타일)



커피를 편의점 커피음료로 입문한 셈이지만 그 시기를 지나서는 달달한 커피음료는 입에 대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우연히' 마신 아메리카노 한잔이 나를 본격적으로 커피의 매력에 빠지게 했다. 그렇게도 쓰기만 했던 아메리카노가 향기롭게 느껴지는 경지에 이르렀건만 사실 지금도 커피맛을 잘 모른다. 그저 산미 있거나 탄 맛의 원두는 취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커피 애호가이다. 음.. 애호의 카테고리에 넣기보다는 영양제 혹은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고2 큰 딸아이가 최근 믹스커피맛을 알게 되어 주로 학원에서 한잔씩 마신다고 한다. 그래서 슬며시 아메리카노를 권해봤는데 쓴 약 같아서 못 마시겠단다. 어른들은 이게 정말 맛있어서 마시는 거냐고 물어봤다. 그치그치 아직 그 맛을 모르는 게 맞지! 그 쓴 맛이 맛있어지면 어른 되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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