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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원 Jun 20. 2023

발끈하지 마라. 세상은 알아서 돌아간다.

부조리한 현실에 화가 날 때.

“어멈이란 년이 그런 소리나 하고 쯧쯧...”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접어 식탁 위에 내려놓고 숟가락을 집어 국그릇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 들린 엄마의 목소리다. 

놀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주중에 휴일이 생겨서 늦잠을 자고 남편은 회사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모처럼 엄마와 마주 앉아 아침 겸 점심을 먹던 중에 회사 동료에게 걸려 온 전화를 길게 받은 후였다.


“뭐가?” 나의 통화 내용 중 어느 부분이 엄마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엄마에게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물었다. “남의 흉을 뭘 그렇게 길게 해?” “내가?” 아닌 게 아니라 전화를 한 동료의 용건은 정작 다른 데 있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상사의 험담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아~~ 그거!” 나는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고 얼버무리듯 “출, 퇴근 시간 체크 하는 거 내가 다 찍어 주는데 일은 자기가 다 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니까 얄미워서 그렇지.” “해줄 거면 공치사하지 말고 해 줘야지. 얘 키우는 어멈이 남의 욕을 그렇게 하고 다니냐? 애들 들을까 겁난다.” “학교 간 애들이 무슨 수로 들어?”


 나는 내 편 안 들어주는 엄마가 서운해서 뾰로통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엄마는 심술부리듯 국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젓가락으로 김치를 뒤적이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없이 내 국그릇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쓸데없는 소리만 길게’ 한 탓에 식어버린 국을 바꿔주려는 듯 가스레인지 위 국 냄비에 불을 붙였다.

 “국 안 먹어도 돼. 갑자기 더워졌어. 뜨거운 거 먹으면 더 더워,” “그렇게 니가 발끈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 끝은 다 안 좋아. 그러니까 괜히 구시렁거리지 말고 너는 니일이나 잘해.”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중년의 딸이 엄마에겐 아직도 철없는 스무 살배기 같은가 보다. 민망함에 투정 부리는 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국을 내 앞에 놓아줬다. 

엄마 말이 맞았다. 그 이듬해 나의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과도한 뇌물(?)을 요구한 벌로 권고사직 당했다.    

 


20년 전, 엄마는 귀가 밝아서 다른 사람 험담을 하던 나의 잘못을 야단쳤었는데,  지금은 옆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이기적인 노인네로 변했다. 덕분에 나는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 눈치 안 보고 큰소리로 흉을 보며 수다 떨 수 있다.  오늘도 엄마를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엄마 집에 왔으면서도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에 대고 한 시간 넘게 누군가의 흉을 보는 중이다. 그렇게 수다로라도 풀어야 속이 좀 시원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스마트폰을 잡은 팔이 저리고 아파서, 통화를 마쳤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하는 말도 잊지 않고.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하고 싶은 말을 길게 했지만, 막상 통화를 마치고 나면 뭔지 모르게 뒷맛은 씁쓸하고 허탈하다.


엄마는 여전히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괜히 화가 난다. 이럴 땐 엄마가 ‘시끄럽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하면서 야단 좀 쳐주면 안 되나? 

엄마는 골프 채널에서 방송 중인 골프 경기 시청에 열중이라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그린 위에서 구르던 공이 홀을 살짝 지나가면 ‘에이~~’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나의 긴 수다를 외면한다. 어쩌면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는 딸이 실망스러워 못 들은 척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이젠 네가 누군가에게 그러지 말라고 얘기할 차례’인 걸 깨달으라는 건가?


나는 아직도 내 기준에 안 맞는 사람은 싫은 까닭에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 순위에서 밀어내는 평범한 사람인지라, 세상이 알아서 처리해 줄 때까지 진중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이런 조급증엔 엄마의 단호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약인데, 그 약을 이젠 영영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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