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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Aug 05. 2022

등산일지

반팔에 긴바지, 불편한 운동화. 어설픈 산행 복장과 지팡이가 되어줄 장우산 하나 그리고 최후의 비상식량인 비상 자두를 하나 품고 산을 올랐다. 산을 타고 그간의 열기를 후 뱉어내며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셔보자는 것이 이 어이없는 행동의 취지였다. 비장한 표정으로 산을 오른 지 5분째 어깨도 다리도 무거워졌다. 괜히 오른다고 했나,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모기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애벌레들을 내쫓기 위해 행사장의 풍선처럼 팔을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그나마 버틸 만했던 것은 가방 안에 있는 자두 한 알 덕이었다. 너무 힘들면 자두를 먹자 그 생각으로 계속 산을 올랐다.


산에는 나무가 많다. 벌레도 많고, 돌도 많고, 계단도 많다. 특히 그 둘이 합쳐진 돌계단이 많다. 이제 더는 못 가겠다 싶게 올라갔는데 돌계단이 나오고 돌계단을 지나면 흙으로 된 오르막길이 나오고 흙으로 된 오르막길을 오르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나무계단을 지나면 다시 돌계단이 나온다. 삶에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다는데 산에는 왜 오르막길만 있는 것인가. 장우산 하나를 의지하며 기어가듯 산을 올랐다. 나는 왜 이런 어이없는 계획을 했을까. 소나기까지 내리다니. ‘다음 구간에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이것 하나도 못 해내면 뭘 해내겠어.’ 생각하다가 ‘ 굳이 안 해도 될 오기를 부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 이런 것이라도 아니면 오기 부릴 일이 어디 있겠어. 오기 부리고 싶어도 네 하고 순응해야 할 일이, 더 많지’ 생각했다. 비가 오고 숲은 스산했다. 누구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구나 싶었다. 애꿎은 장우산만 지팡이 삼아 쿵쿵 내려찍으며 흩어지는 개미들을 보며 걸었다. 커다란 숲속에 놓여 내가 미물같이 느껴졌던 순간은 그렇게 버텼다.


비가 온 후여서 그런지 숲은 스산했고 사람은 없었다. 나 혼자 산에 있는 듯한 느낌에 헷갈리는 길을 만날 때면 금방 불안해졌다. 설상가상 GPS가 계속 둘레길이 아닌 산 한 가운데를 잡았다. 이상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난신고가 잡힐까. 이곳에는 나밖에 없는데. 죽은 벌레와 그걸 먹기 위해 몰린 개미 떼들이 보였다. 자연의 순리라지만 그래도 인간은 죽으면 장례도 치러주고 함께 애도해주는데, 그게 인간다움이구나.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사람이 보였고 둘레길 표지판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거기 사람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만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걸어야 할 뿐이었다. 다시 흙길을 걷고 우산을 쿵쿵 찍어 벌레를 내쫓고 계단을 오르고. 반대편 쪽에서 오시던 할아버지가 가쁜 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도 그쯤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지나쳐 내려가는 길은 내리막이 연이어 이어졌다. 수월했다.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할아버지에게는 연이은 오르막길이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하셨던 것이었다. 같은 길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내리막이 누군가에게는 오르막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오르막을 한참 오르고 할아버지를 만났으니, 할아버지가 이후에 갈 길은 내리막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둘레 길은 산길로 이어져 있지만 중간중간 빠져나갈 수 있는 둘레길 입구들이 있다. 40분쯤 산을 타고 나니 둘레길 입구가 나왔다. 저 멀리 차가 다니는 입구가 보이자 더는 참지 못하고 비상 자두를 꺼냈다. 반팔에 우산 하나 들고 자두를 먹으며 산에서 나오는 모습은 등산객 아주머니들의 눈길을 끈 것 같다. 오두막 아래서 자두를 먹으며 이걸 먹고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남은 길을 갈지 결정하기로 했다. 와그작, 어여쁜 둥그런 자두는 달았다. 이 자두는 평생 못 잊겠다 싶었다. 금세 반 틈을 먹은 자두를 보며 이제는 비상 자두도 없다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더 가기에는 너무 더웠고 많이 지쳤었다. 앞에 계신 아줌마의 부채를 빌려서 땀을 식히고 싶은 정도였다. 그렇게 남은 자두를 다 먹고 가만히 앉아 땀을 식히고 나니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야만 할 것 같았다. 비상 자두의 힘을 받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차게 발은 내디뎠지만 현실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는 비상 자두도 없었고 새로운 방법으로 신나는 노래라도 들으면서 가자고 가방 왼쪽 주머니에 넣어둔 이어폰을 꺼냈다. 제법 흥이 나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이대로만 가면 금방이겠다 싶었다. 그때 젊은 아주머니  분이 말을 거셨다. “산에서는 이어폰 되도록 끼지 말아요. 가끔 아줌마들이 있지만 그래도 스산하잖아걱정이 돼서 서둘러 올라오셨다고 하셨다. 다정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서둘러 이어폰을 정리했다. 그리고  뒤부터는 먼저 앞서간 아줌마의 뒤를 따랐다. 산을 익숙하게 타는 아주머니를 보며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적당한 힘을 냈다. 홀로 걸을 때와는 다르게 누군가 걸었던 길을 걷는 것은 쓸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안심이 되었다.


걸어나가는 동안 애벌레인지, 거미인지 모를 실들이 팔에 감겼고 모기들은 기회를 보며 날아들었다. 힘들다는 생각에서 다와간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는 등이 너무 가벼워서 가방의 내용물이 빠졌나 몇 번 등 쪽을 휘저어 확인했다. 가방은 내용물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아줌마를 따라 가다 보니 도착이었다. 나비 몇 마리가 팔랑거리고 있었다. 콘크리트 길이 그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1시간 30분 만에 숲에서 빠져나왔다. 이상한 만족감과 뿌듯함. 이런 계획을 한 자신에 대한 우스움. 참 엉뚱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겪을 법한 일이었어.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자두를 두 알 챙겨야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지 말자 집 나가면 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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