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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 땅에서 피어난 꽃 Oct 06. 2021

공기도 정서도 정화합니다.

내가 가꾸는 식물, 나를 가꾸는 식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워 몸을 이리저리 들썩이고 뛰쳐나가듯 일어나게 되던 여름은 분명 지나갔는데 여전히 내 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창밖 풍경이 잘 보이고 춥지 않아서다.

  쎄- 하고 들리는 건 분명 풀벌레 소리 같은데, 덥지가 않다. 창 바로 앞에 공사 때문에 설치된 흰 가림막으로 인해 나무는 거대한 장벽 뒤에 끄트머리만 겨우 보이게 되었지만, 여전히 푸르르고 단풍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시월인데 덥지만 않은 팔월의 늦여름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만 같다.


 창밖 풍경은 내가 내 방에 오래 머물고 싶은 이유 중 하나다. 숲을 이룬 저 나무들은 언제부터 저렇게 자리를 지켜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나무들을 약간의 경이로움을 갖고서 바라봐 왔다. 그 시간이 오래되었기에 언제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대로의 자연과 인간의 편의는 언제나 대립하기에, 다수를 위하고 다수에 의해 결정된 개발로 나무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거대한 벽에 갇히고 정돈이라는 명목 하에 수십에서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있었을지 모르는 나무들이 잘려나가 사라질 것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나무 근처에 자리를 지키던 무덤들도 결국 다 이장된 것을 보면 예정대로 개발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하기에 막을 수 없는 사업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저 풍경들을 충분히 봐왔으니까라며 받아들이려고는 하지만, 편의를 위한 파괴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게 창 바로 앞은 밋밋하고 삭막한 큰 벽의 풍경으로 가려져 버렸는데,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쉬게 해 주던 큰 나무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나는 그 벽을 다시 덮어, 가리게 되었다. 연둣빛 초록빛의 나의 푸른 식물들. 살 당시에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생각했던 필로 델 드론과 잎 색이 밝은 연둣빛이라 예뻐서 산 5천 원짜리 스파티필룸, 선물 받아 키우고 있는 호야까지. 세 친구이다. 내 눈과 마음을 얼마간 려둔 채로 가만히 잠기게 되는 화분 세 개가 아주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좋다. 애착 담긴 내 손길을 타, 자라는 저 푸르른 생명이.


 그 모습을 잠깐이 아니라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꽤 오래 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휴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일의 고됨과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가만히 저 식물들을 바라보며 털어내고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창문은 침대와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인데 침대에 붙어 앉아 떨어져 있는 그 식물들을 보다가 한 번씩 눈에 들어오는 다른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지지대의 위치를 다시 바꿔주기도 해 본다. 상호적일 수 있다는 것은 참 좋게 느껴졌다. 오가는 것이 있는 채로 쌓여가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식물이 정서에 좋다는 말을 몇 달째 키워보니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정서를 충족하고 치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어쨌건 살아가면서 닳고 또 썩어간다. 썩은 과일에 바짝 맞닿아 붙은 다른 과일의 부분이 썩어가듯이 말이다. 썩은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마찬가지로 물들어 변질되지 않으려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고집은 옳은 것에 가까운 것임에도 오히려 고통스럽고 고립되며 난처함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넘어가 버리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편함을 위해 선을 넘게 된 후엔 무감각해지고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악해질지 가늠하기도 힘들어진다는 게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정서를 지켜주는 것 역시 나와 타인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 중 하나이며 나의 경우는 식물이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점에서 정성만큼 혹은 무관심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알아서 잘 커 주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은 고맙기까지 하다.


 과거에 식물을 키우기 전에는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어딘가 유순하고 부드럽고 여유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특징이 있는 걸까 신기하고 궁금했었다. 그들이 원래 그런 성향이라서 식물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자연 속에 안착해 치유하고 만족해 사는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식물로 인해 그렇게 된 경우도 반 이상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에서 대강 짐작과 추측을 하는 것과, 직접 시간을 들여 경험하며 여러 가지를 느끼는 것에서 앎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행여 바쁜 삶으로 돌보지 못해 내 손으로 죽일까 망설여졌지만, 또 막상 있으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식물은 정적이고 그래서 크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부담이 적으면서 얻는 것은 많은 고마운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러 가지 물건이 많은데도 방 안에 식물과 나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크기와 달리 꽤 커다란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방 안에 오직 그렇게만 있더라도 안정적일 것 같을 정도이다.


 눈이든 마음이든 잠시 멈춰 쉬고자 침대 위에 좌식 책상에 있던 것들에서 눈을 조금 멀리 떨어진 식물을 보면, 어느새 밝았던 하루가 어두워질 때까지 진득하니 뭔갈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얻는다. 얼마 전 분갈이를 할 때 서툰 솜씨로 뿌리를 두 개 끊어 먹기도 해서 죽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지냈던 2주가 무색하게 말려 있던 들이 벌써 3개째 펴지며 뻗어 나가고 있다. 크다고 느꼈던 화분들이 점점 비좁아지고 있어서 조만간 화분을 사서 주말에 또 분갈이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화원이라도 놀러 가볼까? 식물에 관한 생각들은 어느새 마른 삶에 생기를 주는 즐거움이 되었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것처럼 마음도 정화될 수 있었다. 내 마음 역시 잘 가꾸기 위해 나는 식물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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