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오전 일찍 나가야 하는 일정이 있음에도, 도저히 이 글을 남기지 않고 자버려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바로 지난주 토요일의 일이다.
몇 달 전부터 기대를 해왔지만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드디어 다녀왔다. 주말 오후인 만큼 사람들이 미어터졌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이고 유명한 출판사들은 특히 더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시회에서만 특별히 볼 수 있고 살 수 있는 볼거리나 책 등 있었기에, 벌어질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가깝고도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건 벽면 빼곡히 시집들이 늘어져 있던 [문학과 지성사]의 부스였다. 시집 출판사는 많지만, 시집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출판사는 역시 문학과 지성사가 아닌가 싶다.
여느 출판사들처럼, 문학과 지성사도 리커버 된 책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바깥쪽 매대에 쌓여 있던 건 시집이었다. 은빛 같은 밝은 회색과 금박을 입힌 효과가 나는 금색 글자로 새롭게 표지를 만든 박준 시인의 시집이었다. 정말 유명한 시와 시인의 시집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함께 왔으면 좋았을 친구가 한동안 참 좋아했던 시집이었기에 반가웠다. 그리고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순식간에 가득 차 있던 시집이 얼마 안남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리는 바람에 나도 서둘러 두 권을 사버렸다.
그리고 시집이 짧은 순간에 갑자기 팔리게 된 이유를 곧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옆에서 박준 시인님이 있었으며 구매한 시집에 사인을 해주는 사인회를 해주는 것이었다.
소식을 듣지 못하고 현장에 와서 정말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기회라고 생각했다. 박준 시인을 좋아하는 친구가 박준 시인의 사인이 담긴 시집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들어 꼭 받아 가기로 했다.
부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정도의 간격을 두고 벽에 붙어서 한 줄로 서 있었고, 내 앞사람들이 사인도 받고 사진도 함께 찍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기다렸다. 그리고 친구에게 무슨 문구를 적어달라고 할까 물어보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아무 문구나 받아도 상관없었지만, 친구가 원했던 ㅇㅇ책방이라는 문구를 적어달라고 요청을 했다. 4글자만 적어달라고 하니, 잠깐 고민을 하던 시인이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하면서 작게 당근을 하나 그려줬는데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서 오히려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시집에도 마찬가지로 사인을 받았는데, 작가 지망생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해주고 싶은 말 같은 것을 적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주셨다.
가볍고 즉흥적으로 이야기한 거였지만, 작가지망생이라고 말을 꺼냈을 때와 무슨 글을 쓰냐는 물음과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는 말에 수필과 소설 쪽을 생각하고 있다고 답을 하자, 내 안에서 어떤 스위치가 눌린 것이기라도 한 것일까?
코엑스에 오기 전 용산역 영풍문고에서 일행과 약속 시간을 기다리면서 쓴 짧은 글이 있었는데, 꼭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 번이 아니면 이렇게 작가님에서 직접 내가 쓴 글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용기를 낸 것 같다.
하지만 한창 사인회 중이었고, 내 뒤에도 사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시인님은 우선 정중히 거절을 했고 나도 상황을 보고 받아들였다. 대신에 사인회가 끝난 뒤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해서 물러 선 뒤에 사인회가 끝나는 시간을 물은 뒤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잠시 다른 곳을 구경을 하다가 오기로 했다.
그러면서 잠시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했는데, 방금 전의 순간에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을 때 자신에게 주는 거냐라는 물음이 돌아왔고 그때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준비 없이 모르고 갔기 때문에 준비도 안 되어 있었긴 했지만, 사실드릴 수 있을 만큼의 자신 있는 글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나를 부끄러운 기분을 들게 하는 한 편으로 큰 아쉬움이 들게 했었던 것이다.
내가 좀 더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완성되어 있었다면 즉흥적으로라도 자신 있게 내 글을 선물 삼아 드릴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그게 참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냥 이대로 돌아가지 말 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내 글을 보여드리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부끄럽고 자신이 없는데, 사인받은 것에 만족을 해야 하는 게 나은 것은 아닐까라는 망설임이 커졌던 것이다.
어쩌면 완성된 존재 앞에서 나의 미완성적인 모습과 미숙함이 그제야 살에 와닿게 실감이 난 것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아쉬움과 부끄러움의 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모한 욕망이 더 컸던 것일까. 결국 나는 시간이 다 되어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고 사인회를 마치고 짐을 챙겨서 부스를 빠져나가는 시인님에게 서둘러 다가가 다시 한번 공책을 내밀고야 말았다.
시인님은 오래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하니 내 작은 공책의 한 장 정도의 글을 읽어 주셨다.
그 뒤에 짧지만 몇 마디의 말을 해주셨고 나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 후 정말로 각자의 갈 길로 갈 수 있었다. 바쁜 사람을 붙잡고 귀찮게 해 버린 것 같아 못내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무모함이자 용기 있는 경험이었다.
대신에, 다음에 혹시라도 만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글을 써서 선물로라도 드리고 싶다는 목표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좀 더 내게 시간을 내어준 시인님께 작은 보답이라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에서 빠져나온 뒤,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 차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소중히 들고서 나는 친구에게 오늘 일을 풀어놓으며 마지막 순간에, 글을 보여 드리고 들은 몇 마디의 말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시 한번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자기 이야기와 고백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세상의 이야기도 쓸 수 있는 것이니, 지금처럼 쓰는 게 중요하다."
글을 쓰면서도 막연한 기분과 부족한 기분 속에서 헤매고 괴로워하는 내게 저 짧은 말은, 잔잔하지만 그 안은 정말 따뜻한 격려의 말처럼 느껴졌다. 갖추고 채워야 할 것은 분명 많겠지만 그래도 방향을 잘 잡고 가고는 있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녹록지 못하고 걱정 가득한 현실 속에서도 놓지 않고 계속하고 이뤄내고 싶어서, 마찬가지로 작가가 되고 싶어서, 점잖고 예의 바르게 물러서지 못하고 기어이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나였나 보다.
사인을 받은 시집(좌)과 시인님께 보여드렸던 노트(우), 글 구상 노트(아래)
내일은 사인받은 시집을 전해주러 간다. 그래서 다시 생각나고 이대로 흐릿하게 어렴풋이 만 기억날 만큼 잊기 싫었던 것 같다. 나를 매몰차게 뿌리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내어 말을 해준 작가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외부에 글을 남김으로써 우연히라도 내 글을 보았을 때, 멀리서 쓴 모르고 있던 편지를 알게 된 기분이 드셨으면 했다.
아직은 들고 다니면서 쓰는 작은 노트, 구상 노트 정도에 머물러 있는 글들이지만 좀 더 잘 다듬어져서 세상에 내 보이게 될 수 있다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다시 한번 찾아가 그때 감사했다며, 정말로 글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까지 나는 지금처럼 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서 더 깊어질 수 있도록 해야만 하겠다. 억지로 알리진 않을 생각이지만, 목격자를 만들어 분명하게 만들어 남겨본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들이 증인이다.그러니 지켜봐 달라. 이 글은 편지이면서도 그러한 다짐을 공표한 기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