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플래너를 내년 다이어리로 다시 쓰기로 하다
믿기지도, 실감이 나지도 않지만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제 익숙했던 2022년은 현재가 아니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과거가 될 것이며 다가올 새해인 2023년이 현재로서 1년의 시간 동안 곁에 머물다 마찬가지로 갈 것이다.
, 어딜 가든 북적이든 사람들 속에서 올 한 해 고생 많았다는 덕담과 함께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듣고 지나쳐 왔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연말 분위기일 것이다.
지나 봐야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만큼 지나가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 허무함, 한 살 더 먹는다는 싫은 감정들도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감이나 불타오르는 희망감 크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온다는 것에 대한 감각도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커다란 여러 감정들을 느끼며 감상에만 젖어있는 사람들보다는 어쩌면 더 준비를 잘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나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행동은 12월 20일쯤, 대략 열흘 전부터 시작을 했다. 평소에 할 일들과 야근을 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여러 가지를 했지만, 역시나 무엇을 하든 가장 우선이 되었던 것은 생각 정리와 계획 짜기였고, 그 후로는 정리를 했다.
단순히 지저분한 걸 치우고 버릴 것은 버려내는 일상적인 정리가 아니라 이 마무리이자 준비를 위한 목적이 있는 정리였다. 사실 이에 대한 생각은 한 달 전인 11월부터 해왔던 것이다. 실행만 시기에 맞추어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계기는 책과 필기구를 사러 방문하게 된 대형서점에서 일찍이 진열되어 있던 각종 다이어리를 보면서였다.
그중 특히나 생각보관함, 기억보관함이라는 저 지칭이 나에게 많은 것인지 커다란 것인지 모를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보관을 한다는 것은 현재보다는 지난 후에 알 수 있거나 위한 것이다.
사실 다이어리를 쓸 때는 현재적인 인식이 강해서 마찬가지로 현재에 치중된 물건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지나고 나면 결국 시간, 기억, 생각을 보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미 내포되어 있었음에도 까맣게 잊고 살았던 사실이었다. 그것이 표면에 드러나자 잔잔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2년 정도, 선물을 받은 다이어리를 꾸준히 써오면서 어느새 다이어리를 쓰는 습관이 베어, 다이어리를 쓰는 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편리해졌다. 다만 고정되고 내 시간이 적은 나로 하루에 할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 적고 한정적이라 조금은 투박한 다이어리를 원했다.
그래서 비싸고, 고급지고, 꼼꼼히 그리고 열심히 쓸 수 있는 다이어리보다는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다이어리를 원했다. 그런데 한껏 힘을 주고 나온 다이어리들 속에 그런 건 없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유용함과 알찬 구성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에겐 어울리지가 않았고, 심지어 나보다 다이어리가 더 귀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차마 그 다이어리들을 골라 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대형서점이든 인터넷이든 다이어리를 봐도 망설이다 사지 않길 반복하거나,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는 넓은 의미의 다이어리나 사버리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12월,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한 해가 가기 전에 끝마쳐야 할 것들을 부지런히 해치우고 있을 때 다이어리에 대한 생각도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올 해는 쓰지 않을까? 하다가도 그러면 내 생활이 쓸 때만큼 착실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차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필요는 하지만 2023년이 박혀 버린 다이어리는 부담이었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예전에 쓰다만 다이어리를 쓰면 되지 않을까?
나에게는 그런 다이어리들이 많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홍보용으로 준 얇은 플래너와, 직접 결의를 가지고 산 플래너도 있었다. 그것들은 무려 고등학교 때의 것들로 언젠가 쓰겠지 하며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별로 쓰지 않은 새것에 가까운 물건을 버리기 아까운 것도 있지만, 그것을 버린다는 건 이 것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해 결국 괜찮은 물건 버리기나 하는 한심한 모습을 내 모습으로 갖기 싫어서였던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거나 않은 것들이 내 방엔 무척이나 많았다.
그래서 사실 그 플래너들도 얇은 만년 플래너 빼고는 몇 번이나 쓰려고 했다. 후련하게 버리든 열심히 보냈다고 자랑스럽게 보관하든 간에. 그러나 치명적 이게도 날짜 옆에 요일이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어긋나는 그 요일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과거의 것을 가져와 현재에 써서 맞지 않는 그 불편함과 불만족스러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잊고 지냈는데 2013년의 플래너와 2023년, 10년 주기였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제일 걸려했던 그 요일이 맞을까? 궁금해서 일단은 정리를 열심히 하며 나는 그 플래너를 찾았다.
오래된 물건이고 현재의 많은 짐들 속에 파묻혀서 찾기에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정리를 하면서 찾은 다른 물건들을 새해에 할 것으로 정하게 되는 일들만 반복 됐다. 어디에 뒀는지, 결국 모르는 사이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일주일 가까이 찾았을까? 드디어 찾아내고야 말았고 확인을 하고서 나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요일까지 모두 같은 것이었다. 쓸 수 있다! 내년의 플래너로.
기뻤다. 굳이 새로 사지 않아서 지출이 생기지 않거나 짐만 또 늘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거의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써내지 못해 씁쓸했던 과거를 올해에 만회하고 비로소 청산을 할 수 있다는 의미,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이 결국 내가 내 인생을 잘 살기 위한 나의 과제였기도 했으니까. 또한 이제부터 생각만 하지 않고 제대로 시작해 결괏값을 낼 할 일이었으니 올해가 될 내년의 테마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 시작을 나는 10년 만에 다시 쓰는 다이어리로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다이어리를 시작으로 빛 못 본 체 머물러만 있던 다른 것들도 좀 더 진취적으로 해치워 나가기까지 할 것이며 기록해 가보고자 한다. 그러면 자신감 없이 손에 거머쥐지 못했던 갖고 싶던 다이어리들은 다음엔 자신감 있게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 아깝지 않도록 나는 잘 써낼 수 있다고, 그것을 증명한 게 이렇게 남아 있다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