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보는 20대(2)-나의 세 사람에 관한 긴 이야기
나이가 어리진 않더라도,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망설임 없이 7살부터 9살까지의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가 가장 힘들고 불행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 이후의 거의 모든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지난 연애가 상흔을 크게 남기긴 했어도 다행히 그전처럼 치명적이진 않았다. 자꾸 힘이 빠지긴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아직 마음에 원망과 불신이 가득했기 때문에
억지로 만나지는 않으려고 했다. 통과해 온 지난 시간 동안 때로는 단절이 치유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마음이 낫지 않은 상태에선,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에, 심심하고 외로운 기분에 휩싸이는 날은 많았다. 하지만 사람만 한동안 만나지 않는다면, 내 인생에 큰 일도 아픈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20대 중반이었던 이때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10대였다고 굳게 믿었다. 청소년기였던 그 시기의 몇몇 사건들이 아니라, 형태와 정도만 달랐을 뿐 10살부터 19살까지의 시간이 통째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악마 같은 아이들이 날뛸 때,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법은 물론 제재할 수단이 마땅히 없었고, 교실과 학교라는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스란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성장기의 예민한 감성이 그 고통을 증폭시켜 격통으로까지 만들었다. 무려 10년에 걸쳐, 미성숙한 만큼 거침없는 잔인한 마음을 겪어낸다는 것은 결코 형벌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지나고, 절망 속에 있을 때도 나는 작은 긍정을 품었다. 살면서 이 정도의 격통을 다시 겪을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아무리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었어도 그때보단 고통스럽지 않다고 늘 생각하기도 했다.
그저 너무 힘든 시기를 미리 앞당겨 겪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그 시기를 지나왔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확실한 과거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되뇌기도 했다.
또한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쳐 상당히 많이 치유해내기도 했기 때문에 앞으로 힘든 일이 생겨도 잘 견딜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한편으론 있었다.
그런데 자신할 수 있었던 그 믿음이 20대 중반부터 1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무너져 버렸다. 연속적인 믿음의 붕괴와 함께, 인생에서 손꼽히게 힘든 순간이 10대를 훨씬 지난 시기의 나를 덮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게는 나를 안정적으로 둘러싼 벽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살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풍파에 벽돌 몇 개가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 벽은 사실 벽돌 하나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벽돌이 없으면 벽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가장 먼저 떨어져 나온 벽돌은 외할머니였다.
예전부터 할머니께서는 머리와 귀 쪽이 자꾸만 아프시다고 하셨기 때문에, 한 번씩 병원에 모시고 가곤 했다.
그런데 그 고통의 호소가 내가 20대 중반이 된 시점부터 굉장히 격렬해지기 시작했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셨다.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아프다는 말만 중얼거리시기도 하고 심하면 울부짖기도 하셨다. 그 모습이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내과든 한의원이든, 증상과 관련된 병원들만 쭉 돌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다른 종류의 병원을 가보라는 소리들뿐이었고 할머니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던 중, 나는 문득 내가 20대 초에 겪었던 마음의 병이 떠올랐다. 형태는 다르지만, 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지내오신 데다가 외가 식구 중 한 명 때문에 지속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상태였다.
원래 몸이 안 좋긴 하셨어도, 신체적인 문제는 없다는 말만 돌아오는 걸로 봐선 심리적인 문제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과 혼란에 빠진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핸드폰 하나에 의지해, 주변에 괜찮은 정신과를 우선 찾아봤다. 치료는 아니더라도 상담이라도 받으면 증상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 정신과를 찾아서 접수를 하고 당일 상담을 받게 되었다. 함께 진료실에 들어가서 주변에 앉았고 할머니는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경청하는 의사는 동시에 많은 것들을 빠르게 차트에 적어 내려갔다. 전문의료인이 아니기에 분석할 순 없었지만 할머니가 그동안 속이 많이 썩으신 것은 분명했다.
상담을 마친 후, 의사는 보호자인 엄마와 나에게 상태를 설명했다. 거기에서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노인의 경우 심리적인 문제가 커지면 그걸 몸의 고통으로 표현을 하거나 실제로 몸이 아프다고까지 느끼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 증상이 상당히 심해서 당장 약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고, 가능하면 짧게라도 입원치료를 하고 상태가 괜찮아진 후에는 통원치료를 할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입원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했지만, 당연히 할머니는 정신과에 대해 왜곡된 인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거부했다.
이 때는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강제입원의 형태로라도 입원이 가능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는 같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꺼려하고 망설였다.
그래도 일단 엄마 외에 다른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지만 최종적으로 입원이 진행되는 것이었기에 외가식구들에게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다.
때문에 할머니의 형제인 이모할머니에게 전화를 하게 됐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비하와 왜곡된 인식이 가득한 거친 언사를 쏟아내며 극렬한 거부감과 함께 반대를 했다. 이모 같은 할머니의 다른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원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단 지켜보겠다며 집으로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한 뒤 걱정과 고민에 빠진 채 있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냉장고에서 소주를 찾아서 마시려고 했다. 평상시엔 요리할 때 잡내를 제거하는 용도 외에는 입에도 대지도 않는 술을 마시겠다는 행동과 고령의, 좋지 못한 상태의 할머니였기에 엄마는 실랑이를 벌이면서 술을 빼앗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마치 장난감을 빼앗겨 분한 아이처럼 마구 화를 터트리기도 하고, 엉엉 울면서 갑자기 죽겠다, 죽을 거다라는 소리를 반복해서 내뱉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고, 할머니는 거실에서 갑자기 베란다를 향해 달려갔다. 곧이어 창문을 열었고 베란다 난간에 다리까지 걸치더니, 엄마와 내 눈앞에서 그대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깜짝 놀라 엄마와 나는 둘이서 할머니를 강제로 뜯어냈고 거실로 끌고 오다시피 했다. 그 짧은 순간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할머니가 그대로 눈앞에서 추락사했을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엄마는 할머니를 속박한 채 서둘러 외가 식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강제입원의 동의를 구했고 나는 의사와 통화를 했다.
조금 지나지 않아 그나마 가깝던 이모할머니가 찾아왔다. 아까의 강경하던 모습은 할머니의 자살 시도 앞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함께 다시 병원에 갔고 할머니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강제 입원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최악은 막았고 점차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앞으로 찾아올 불행의 전조였다.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던 4월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 식습관을 가졌고 유난히 트림을 많이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단순한 잔병치레가 아니었는지, 갑작스레 대학병원에서 하루 정도 입원을 하면서까지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나도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가게 됐다. 다른 환자들과 같이 쓰는 병실에서 엄마가 있는 침상에 얼마간 앉아 있었는데, 담당의사가 나를 따로 밖으로 불러 냈다.
얼떨떨한 채로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마주 앉은 의사는 다소 심각한 분위기였다. 이어진 의사의 말에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고 순간적으로 내 주변 공간이 무너지는 감각을 느끼고 멍해졌다.
암일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사정없이 뛰고 식은땀이 나는 상태로 일단은 다시 병실에 돌아갔다. 엄마가 있는 침상 주변에는 나이 드신 자매가 보호자와 환자로 있었고 언니처럼 보이는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를 하는 데에서, 미약하게나마 별 일 아닐 거라고 침착하고 태연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선고 같은 무서운 진단을 듣고 온 입장에서는 그들이 애써 가지려는 마음과 믿음대로 정말 별일이 없었으면 했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병실 천장에도 스피커가 있던 건지 다급한 응급 방송소리가 들려왔다. 방송이 끝나자, 그걸 함께 듣고 있던 오랜 경력의 간병인이 나지막하게 읊었다.
"병원은 사람이 참 쉽게 죽는 곳이야."
사람이 살려고 오고, 살아서 나간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왔던 나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는 말이었다.
병실은 배경음처럼 깔린 작은 소리와 불규칙적인 기침소리,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짧게 끊어지는 대화소리 정도만 났다. 나는 그 공간에서 그저 복잡한 마음으로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엄마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도 병원에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저 미약한 기도밖에 할 수밖에 없는 것 알았기에 천천히 병실을 나섰다.
병실을 뒤로하고 완전히 나오기 직전, 등뒤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소름이 돋고 겨우 진정됐던 공포감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아까 무사하기를 바랐던 병실의 자매 중 언니분이 확실하게 암이라고 진단받는 순간이었다. 기도하는 마음과 바람을 비웃는 것도 모자라 짓이겨 버리는 것만 같은 잔인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어붙고 말았고 차마 고갤 돌려 방금 재앙 같은 비극이 닥친 자매를 감히 쳐다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보게 되면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멈췄던 발을 억지로 더 움직여서 완전히 그곳에서 멀어지고 서둘러 병원도 빠져나왔다. 어쩌면 무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에 따라 부모님이 아프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막연히 먼 미래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필 그게 20대 중반의 나이에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그냥 아픈 것으로 끝나면 다행인 것이었다.
다름 아닌 암이다. 암일지도 모르니 각오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바로 옆에서 암을 진단받는 사람을 실제로 보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연에 불과했던 일은 어느새 곧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로 내 근처까지 성큼 다가왔다. 숨이 막히고 속은 매스꺼웠다. 내 앞으로의 미래에도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게는 어린 시절부터 날 많이 예뻐해 주셨던 큰아버지가 있다. 큰아버지라는 존칭보다는 큰아빠라는 어린아이의 친근한 호칭으로 이어져 왔던 시간과 추억들이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큰아빠는 피아노 운반이라는 무겁고 힘든 일을 하셨지만 피아노 조율도 어느 정도 하실 줄 알았고 무엇보다 운전과 길 찾기에 능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어딜 놀러 갈 때마다 큰아빠가 항상 운전담당을 하셔서 그 놀라운 능력을 자연스레 자주 보게 되었다.
아직 내비게이션이 없던 때여서인지 뒷좌석에는 지도가 참 많았다. 그런데 막상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엔 그 지도는 거의 쓰일 일이 없었다. 어디로 가려면 어떤 도로를 타야 하고, 어떻게 가야 한다고 술술 읊으셨고, 막힘없이 운전해서 도착하는 수준이었다.
손재주와 아이디어가 좋아서 집안엔 손수 만든 물건이 많았고, 폐타이어를 둥근 나무판 사이에 끼워서 고정하고 밑에는 바퀴를 달아 이동식 탁자까지 만들어 주신 적도 있을 정도였다.
큰아빠는 성격이 상당히 화통하셔서 다소 거칠고 감정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방송을 보면서 저 언어표기는 잘 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서 해박했고, 재능이 많고 성실하고 부지런하셨다.
운동 역시 열심히 해서 많은 나이에도 뱃살 없이 탄탄한 몸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시고 예뻐해 주셨는지 모른다.
그런 큰 아빠가 폐암, 그것도 말기를 확정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엄마에 이어서 큰 아빠에게까지도 암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심지어 가망이 없는 시한부 선고였다
아직 큰아빠는 모르고 계셨다. 가족에게만 먼저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친가 식구들이 모두 모인 가족회의가 열렸다.
말기암 환자가 되어버린 큰아빠께 이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좋겠는가라는 이야기가 중점이 됐다.
나이 많은 친척 어른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들에겐 가까운 형제였으니, 그 참담함에 쉽게 말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어른들에 비해선 어렸던 나였지만, 용기를 내서 의견을 냈다.
예전에 봤던 실험 결과 중에 환자에게 약간의 거짓말로 병이 실제보다 심각하지 않다고 말하자, 환자가 기대수명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어른들은 즉각적인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나중에 큰아빠에게 전할 때는 폐암 말기에서 2기라고 축소해서 사실을 알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큰아빠는 다행히 여느 말기암 환자처럼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진 않았다. 오히려 살고자 하는 의지로 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아프지 않았을 때처럼 밝은 모습이었다.
외할머니, 엄마, 큰아빠까지.. 주변사람들이 연달아 아프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채 든든히 지켜주던 벽이자 따뜻한 울타리가 하나씩 무너져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직 미숙하기만 한 나에게 한꺼번에 닥치고 짊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 많아 버거웠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두 위중한 상태였기에 힘들다고 미루거나 안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받아온 보호와 사랑에 보답해, 이제는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다. 거기에 계산괴 손익을 따질 순 없었다.
설령 그것이 미래를 꿈꿀 수 없고 뒤쳐지고 손해를 보게 만들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고서 우선, 어떻게든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다.
병든 사람을 지탱하는 건 경제적 부담을 진다는 일이기도 해서, 알바든 뭐든 해서 돈을 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아직 취업처럼 완전히 종속되진 않아 비교적 조율이 쉬웠던 내가 보호자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식구와 친인척을 대신해 보호자 역할로 면회도 가고 병실에서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사실 그 시간 속에서 해야 할 것들, 조급함과 압박감, 정신없이 바쁜 나날 같은 것들은 생각보다 견딜만했다.
나와 달리, 평범한 또래들이 평범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며 달려 나가는 것 역시 부럽긴 했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슬프진 않았다.
그저 유일하게 애석했던 것은, 당연히 찾아올 나이가 많은 가까운 어른들과의 작별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성큼 다가와 버렸다는 것과 동시에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시간이 혼자서 스스로를 돌봐야만 하는 시간이었다면, 20대 중반의 시간은 주변을 돌보고 지탱까지 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어느덧 다음 해를 앞두고 저물어 가는 겨울이 되었다. 일말의 기적이라도 꿈꿨지만, 큰아빠는 결국 병이 많이 진행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잘 이겨내실 거라 믿고 자주는 보지 못했던 큰아빠의 오랜만에 보게 되었을 때의 모습은 비쩍 말라 앙상한 뼈가 다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암 발생 부위가 폐였기 때문인지, 가슴 주변에 얇은 피부를 뚫고 나올 듯이 핏줄이 가득 선 모습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제 정말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게다가 배변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저렸고 큰아빠와는 이제 곧 작별할 날이 머지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아빠에게 큰아빠가 위중하다는 연락이 왔고 아빠는 달려가셨다. 그리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장례식장을 향해가며 엄마는 눈물을 보여 나는 말없이 닦아주었고 도착한 장례식장에 큰엄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계셨다. 갈수록 좋지 못했기에 죽음을 준비하고 받아들이시긴 했어도 참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아직은 눈물대신 한숨으로 꾹꾹 참아내는 것처럼 비쳤다.
천주교식 장례로 인해 생전에 건강하던 모습처럼 혈색이 좋게 화장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관에 누워 있던 큰 아빠를 마주하게 됐다. 꼭 그저 주무시는 것 같아서 실감이 하나도 안 났다.
장례 절차 중 유족들이 고인 앞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그때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보물 하나를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은 상실감이 몰려와 죽음을 실감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펑펑 울며 작별인사를 고하고 그렇게 큰아빠를 이르게 떠나보내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척수 검사까지 했던 엄마는 암 단계까진 가지 않았고 대신 평생 약을 먹으며 병원을 통원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무사히 입원생활을 잘 버티고 퇴원하고 돌아오셔서 나에게, 네 덕분에 살아서 돌아왔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풍파 속에서 나는 벽을 지탱하고 2개의 벽돌은 다시 끼워 넣을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벽돌 하나는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벽에는 벽돌 하나만큼의 빈자리가 생기고 채워지지 않게 됐다.
그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엔, 어느새 20대 후반에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