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보는 20대(3)-내 살길을 찾았던 중후반과 쓸쓸한 마무리
스스로를 돌봐야 했던 시간에 이어, 주변을 돌봐야 했던 시간은 꼭 연이은 폭풍 같았다. 나는 그저 눈도 뜨지 못하는 폭풍 속에서 생존하느라 바빴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시간은 이렇게나 흘렀던 걸까.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세상 속에서, 잔잔한 햇살이 비출 때 드러난 나는 초라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쉴 새 없이 닥치는 고난 앞에서 정신이 없긴 했어도,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점점 낙오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초라한 내 모습에 대해 놀라지도,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던 일들이었다.
다만 그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선명해진 것은 부족한 돈과 시간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그걸 내 삶으로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삶 속에서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에, 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것은 학벌과 경력이었다. 학벌은 대학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경력의 경우는 경력으로 인정받을 일자리의 경험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서둘러 빨리 돈을 마련할 수 있고, 시간 제약을 덜 받는 일들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이 악조건을 보완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단언할 순 없지만 저학력, 무경력이라고 할지라도 자격증이나 활용 능력 등이 있었다면 다양한 면에서 훨씬 나았을 것이다.
취업이 조금이라도 수월할 것뿐만 아니라, 갖춘 것으로부터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있으며 그 자체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이자 자신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무했기에, 아무것도 없는 감각 말고는 가진 게 없는 내가 되었다.
그간의 일들로 시간도, 모은 돈도 없어 보여주기식 스펙조차 갖추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바탕이 된 이미 어려운 가정 형편도 꽤 큰 몫했다.
자격증 책 한 권 사는 것조차 부담이 됐지만, 특히 가장 부담이 컸던 것은 시험 응시료 같은 지출이었다. 시험에서 낙방하게 되어 추가 시험을 계속 보게 될 경우 추가 비용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컸다. 심리적인 압박은 곧 위축으로 이어져, 새로운 뭔가를 배워서 갖추는 것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실패가 용납되지 않기에 도전조차 포기하게 되는 것, 그게 가난의 가장 큰 문제이자 서러운 점이었다.
새롭게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이라도 활용해 보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 능력은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것에만 너무 집중포진 되어 있었다. 또한 능력이 특출 나지 않고 애매했다. 따라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걸로 취업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수익화시키기에도 내 역량이 모자랐다. 결국 사회적인 능력도 부족하면서 잘하는 것을 살려서 돈을 벌 수도 없는 무능함에 대해 좌절감만 깊이 느꼈다.
사회적으로 평가한다면 나는 그저 저학력, 무스펙에 나이까지 많은, 경쟁력 떨어지는 하급 인력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오는 부족한 자신감과 낮은 자존감은, 가진 것과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이런 나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깊이 빠지게 해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아르바이트 목록 중에 눈에 띄던 '사무보조 알바'같은 것에 관심이 가면서도, 지레 겁먹고 지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그냥 지원해 보고, 만약에 안 되겠거나, 실제로 못하겠으면 관두면 되는 건데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커다란 산처럼 느껴져서 쉽게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렇듯, 의욕상실과 부족한 자기 확신은 여러 기회를 놓치게 하고 도전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점점 더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더욱 무력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움츠리고 평생을 살 순 없었다. 마음을 먹고서 이런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일단 해보자며,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몇 군데에 지원을 했다.
뒷 산에서 운동을 하고 있던 9월의 어느 날, 드디어 지원한 곳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용기가 채용으로까지 이어진 걸까, 기대감이 들었고 떨리면서도 기쁘게 내용을 확인했다.
채용담당자는 가장 먼저 얼마나 일할 것인지부터 물었다. 그런데 뒤이어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이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권유를 했다.
하지만 단순업무라는 이 일조차, 힘들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도 영영 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절박함과 의지가 섞여 조금 고집스러운 투로 최소 8개월은 할 거라고, 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일주일 가량 후, 마침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물류센터로 출근이 확정되었다.
알바 경험은 더러 있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다니게 된 곳과는 그 형태가 다소 달랐다. 그전까지는 하루에서 며칠가량으로 근무 단위가 짧은 대신 철야근무 수당으로 많은 일급을 받았거나 연속적으로 하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만 하는 파트타임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장기적이고 고정적인 일자리였다. 그래서 그 전과 달리 상황에 따라 근무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에 벌이는 들쭉날쭉 하지 않고 안정적이었다.
고정적인 수입은 괜찮았지만, 정해진 출근시간과 평일 내내 출근하여 꽤 긴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는 생활은 확실히 강제성이 짙어서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도 다녔으니 못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닌 지 3일 만에, 처음에 채용담당자가 왜 그렇게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렸는지를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용모단정이라는 말처럼, 단순업무라는 말에도 사실 숨겨진 속 뜻이 있었다. 단순한 방식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고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이 드는 일을 가리킨다는 걸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급여는 최저시급으로 계산하고 4대 보험을 떼고 받아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에다 시급제 근로이다 보니, 결근이나 조퇴 등 어떤 이유에서든 일한 시간이 적으면 그만큼 적게 버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저임금 고강도 노동이었다.
또한 일을 시작한 곳의 건물은 연식도 오래된 데다가, 여기저기 부서지고 녹슬어 있었다. 발생하는 먼지도, 쌓이는 먼지도 가득해서 건강에 해를 끼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질 낮은 일자리라고 실감하게 된 것은 그곳에서 겪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급박하고 수많은 물량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해서였을까? 사람들은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다.
압박감과 스트레스 등을 참지 않고 상대에게 풀어버리거나 지나칠 정도로 매일같이 험담을 일삼았다. 그밖에 나열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였다. 그곳에는 어른은 물론 인간도 드물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좋지 못한 일자리나 그 직업에 속한 사람을 기피하고 편견이나 나쁜 인식을 갖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비하나 무시가 아니라 실제적인 모습과 경험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열악함과 악조건 속에서 끈기 없이 포기하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의무 같은 건 없었지만, 최소 8개월은 할 거라고 내뱉었던 말은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었기도 해서 견뎌내고만 싶었다.
어느새 10월이 되고 첫 월급날이 되었다. 9월엔 대략 5일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9월 근무분인 월급은 고작 50여만 원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동안 수입이 없던 상태였다 보니 그 돈도 적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입이 생기자마자 임시로 지출을 담당하던 부모님이 다시 나에게 부담을 지게 했는데, 교통비가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엄마에게 교통비 몇 만 원만 달라고 했지만 돈을 버는데 그걸 왜 줘야 하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바람에 나도 화를 내며 크게 싸우게 됐다.
그날은 대폭 늘어난 신체 활동량과 높은 업무강도, 싸구려 운동화로 인해 발이 퉁퉁 붓고 발바닥은 뜨겁고 아려서 잘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다른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발생하는 교통비 정도만 부탁을 한 거였는데도 막무가내로 화부터 내는 모습에 많이 답답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잊고 있던 나의 근본적인 환경과 처지를 자각했다. 도움은커녕 심리적인 의지조차도 할 곳 없는 나의 현실이었다. 단순한 경제적 가난보다 서럽고 힘들게 다가오는 마음의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그래도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하느라 바빴기에, 차차 다시 잊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10월이 지나고 11월의 월급이 나왔다. 이번에는 5일이 아니라, 한 달 치의 월급이었기 때문에 푼돈조차 손벌릴 일이 없어졌다.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돈을 버는 데에만 집중을 했다.
그러면서 뒤늦게나마 조금이라도 모이는 돈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미래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 하나를 품고 그 고된 나날을 버텨갔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해서였을까, 시간 하나는 참 잘 갔고 벌써 12월이 되었다. 새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이렇게 한 살 먹는다는 것이 아쉽고 조급함과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도 지속적인 수입이라도 있으니 최악은 아닌 건가 하는 생각 사이에서 싱숭생숭했다.
그러던 중 자꾸 무서운 뉴스가 들려왔다. 신경도 쓰이고 걱정도 많이 되는 뉴스였다. 별일 없기를 바랐지만 새해가 지나고 나서 오히려 점점 더 사태가 심각해졌다. 가히 재난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던, 코로나 19 사태의 시작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겨우 안정을 찾아가나 싶었는데 또 한 번, 고난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나 혼자만 집중적으로 외롭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모두가 다 같이 이 재난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얼마 남지 않은 20대의 시간마저 바람 잘 날이 없더니, 결국 이렇게 거의 10년 내내 고통으로 가득 찬 시기가 되었다는 건 씁쓸하고 슬펐다. 다른 형태이긴 했어도 규모는 훨씬 커진, 10대 시절 고통의 연장선과 다를 바 없어졌다.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에 걸쳐 발생한 만큼, 그 영향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끼쳤다. 전례가 없을 만큼 사회기반과 체계, 경제가 붕괴되었고 각종 제한과 변화가 뒤따랐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혼돈 속에 갇혀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얼마나 지독했고 큰 상처를 남겼는지는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어낸 격변의 시간이자 조용한 전쟁 같은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코로나로 인한 피해가 크진 않았다. 전국적인 확산 후에도 감염이 금방 되진 않았고 생계나 활동 영역이 가로막히는 일도 없었다.
그저 여러 제약과 지켜야 할 것들로 인한 불편함, 마음 졸이는 불안감이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코로나가 만들어낸 변수와 영향을 미친 것들로 인해 피해를 보긴 했다. 즉, 코로나 자체보다는 코로나에서 파생된 것들로 인해 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다.
비록 무지하고 부족해서 질 낮은 일자리를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버틸만했던 것은 아주 오래 다니지는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장근무가 많은 시기 정도만 잠깐 다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으면 그 돈을 바탕으로 좀 더 나에게 투자하며 좀 더 나은 일자리로 가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변수가 되어서 이 예상이 빗나가고 나름의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 있던 일자리도 없어지고 있는 사람도 정리하고 내보내는 판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로운 고용도 안 하는 추세였으니 당연히 새로운 취업도 잘 될 리가 없었다.
그걸 보며 현재 나의 일자리 역시 영향을 받아 보존하는 것조차 힘들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좋으나 싫으나 버티면서 상황이 좋아지길 기다리는 수 밖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불과 몇 달 전에 고용이 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고용이 대폭 감소하면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경제적인 위기에까지 빠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당장 월세를 내야 하거나 하필 이 시기에 갑작스레 병을 얻어 값비싼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는데 취업길이 막히게 되면서 차질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걸 보며 불과 얼마 전까지의 고생이 생각나, 순간적으로 가슴이 상당히 내려앉았다. 나의 삶을 희생하다시피 해 사람들을 지탱했던 그런 시간이 또다시 반복되는 건가 싶어서였다.
여기에 아버지도 일이 많이 어려워져서 수입이 줄어들었는지, 아버지의 돈을 받아 생활하는 엄마가 빌려간다는 명목으로 몇 십만 원씩을 자꾸 요구하기도 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았던 내가, 사정이 어려워진 주변의 짐을 나눠 갖게 되면서 처음의 예상과 달리 모을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가진 현금 외에도 취업 후 새로 만든 신용카드를 통해서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통장에서 달마다 대금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도 현상유지만 겨우해 나가던 어느 날, 카드사에서 전화가 왔다. 전체 카드 이용량이 많아, 한 달에 나가는 대금도 많은 상태인데 이 대금을 훨씬 줄여주는 혜택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대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의 혜택인 줄 알고 동의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하던 신용점수가 무섭게 대폭 떨어졌다. 알고 보니, 내가 동의를 했던 건 카드론, 즉 대출이었던 것이다. 혜택이라는 말은 사실상 말장난이었고, 카드론으로 먼저 기존의 대금을 처리한 뒤, 카드론 대금을 갚아 나가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 달에 나가는 돈은 조금 적어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전체 금액을 계산해 보면 오히려 원래 대금보다 훨씬 많이 내는 것이었다. 애초에 워낙 고금리이다 보니 실제로는 불필요하게 많은 지출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멈춰 있다가 겨우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코로나로 무거운 짐이 얹어진 것도 모자라 길마저 잘 못 들게 된 것이다.
함정에 빠진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면서도, 작지 않은 실수를 만들어낸 나의 무지함을 탓했다. 나의 잘못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서 어떻게든 이 카드론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건 제1 금융권 대출이었다. 어차피 새로운 취업이 힘들어서든, 발생한 커다란 지출 때문이든 직장에서 벗어나긴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직장을 다녀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용해 보기로 했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1 금융권 대출이었다.
비교적 안전하고 성실히 잘 갚아가기만 한다면 신용회복 등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카드론을 서둘러 전부 청산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대출을 대출로 막은 것에 불과했다. 번 돈을 미래준비가 아니라 은행에 돈을 갚아 나가는데 거의 다 써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한 순간의 잘 못된 선택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오히려 그전보다 더 큰 마이너스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시작이 뒤늦었던 만큼 서툴고 경험도 지식도 적어, 잘 못 끼우게 된 첫 단추의 대가는 혹독했다. 당연히 이런 나를 도와줄 곳도 사람도 하나 없었다. 힘겨운 또 한 번의 외로운 시간이었다.
만약 실수 때문에 생긴 대출 문제뿐이었다면 그나마 2-3년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진 장기화된 코로나가 정말 지독히도 발목을 잡았다. 지출은 점점 늘어만 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임금을 받는 일자리로는 해결은 물론 이직을 위한 준비도 불가능했다. 오래 다닐 이유가 없는 직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버텨가는 시간만 늘어갔다.
희망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을 기약 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돈을 벌고 더 나은 일자리로 옮겨서 커리어를 만드는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을 매여 있으면서 점점 망가져가는 몸과 텅 빈 마음으로 피폐해져 갔다. 가졌던 희망도 작은 꿈도 하나도 남지 않은 채, 나의 20대는 쓸쓸하고 조용하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