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의 주인은 바로 나인 이야기
첫 장면부터 심기를 건드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런 장면을. 고등학생들의 농도 깊은 키스.
‘요즘 애들이 정말 저렇게 한다고? 학교에서 은밀하게 저런 짓을 한다고?’
엄마는 한 술 더 뜬다. 딸에게 남자친구와의 진도를 묻는다. 뭐가 문제냐고. 엄마에게 털어놓으란다.
나에게는 낯선 상황이다, 사춘기의 딸과 엄마가 주고받는 대화라고 감독은 확신한 건가? 어디서 주워 들었지? 영화는 각도를 벗어나 산으로 가고 있었다.
불편할 만큼 너무나 가까운 모녀사이. 내가 결코 이해 못 할 엄마와 딸의 대화 주제.
계속해서 영화는 내 속을 긁어댄다. 평범하지 않은 집인데… 분명 오버액션이 맞는데…
사과를 보며 숨이 안 쉬어지던 공포는 진짜 같았는데 그 애는 자신의 연기로 다른 이들을 속였다고 웃어넘긴다. 자꾸만 바닥에 숨겨진 뭔가가 들춰지고 있다. 꾹꾹 밟아 눌러놓은 기분 나쁜 진실이 스멀스멀 연기를 피운다.
딸의 전화를 피하는 아버지. 저 집의 송곳은 아버지 쪽이구나. 뭐지? 이 기분 나쁜 예감은.
서명운동의 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인이를 보며 확신했다. 성범죄의 피해자구나. 그 범죄가 아버지의 부주의로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아버지는 여태 도망 다니고만 있었고.
보는 내 심장이 덜컹 주저앉을 정도로 당당히 자신이 피해자라 밝힌 후 엄마와 딸은 자동세차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듯 딸의 분노에 휴지를 건네는 엄마. 그리고 “한 바퀴 더 돌까?” 묻는 엄마의 표정에서 나는 무너졌다.
해결법을 찾을 수 없는 엄마의 무력감. 시간을 견디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들. 한 바퀴가 어딜까? 동네 한 바퀴 드라이브?
어쩌면 또 다른 곳의 자동세차장이지 않을까.
미칠 것 같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대성통곡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나의 울음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는 것이 싫었다. 듣지 않아도 얼마나 시리게 처절할지 나는 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서웠다. 고막에 박혀 빠지지 않고 내내 윙윙거릴 것 같아서.
주인이와 엄마가 시끄러운 자동세차장 기계음을 찾은 것은 자신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지 않을까. 서로에게 박혀서 더 날카로운 생채기를 낼까 봐.
주인에게 전달되는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쪽지들.
나는 갑작스레 감독이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결론지을까. 가족이 무너지는 과정으로 간대도 특별할 것 없는 엔딩이고, 현실성을 배재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한다면 대중의 지탄을 받을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려나’ 그의 선택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다급한 마무기는 아니길….
소원하는 구체적인 결말은 내게 없다. 왜냐하면 나는 고작 변두리 관찰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 무너지는 사건과 엄마로서 지켜보는 애끓는 모정도 감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편한 장면이 기다릴 것 같은 불길한 긴장감은 정말 싫다. 자근덕거리며 덧대지는 절망은 영화에서라도 없었으면 바랐다.
화들짝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급작스럽게 던지듯 고백하기에는 성폭행의 피해자라는 경험은 둘러앉아 있던 친구와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나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재는 도대체 어떤 애야? 여기서 갑자기 알린다고? 과연 여기서 나온 말이 비밀로 지켜질까?’
주인이의 행동이 성급했다 느껴졌던 건 이후 이어지는 친구들의 시선과 쑥덕거림, 그리고 2차 가해 같은 행동들이 예측되어서였는데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나는 미성년자라는 기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미성숙했다는 전제하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라는 기준일테지만 결코 성인에게도 밀리지 않는 잔인함과 대담함과 그리고 영악함이 있는 나이가 아닌가.
게다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쪽지까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매일 마주치는 동급생일 것이라는 건 명백했다. 이젠 얼굴 없는 누군가 때문에 또다시 불안하고 억울해야 한단 말인가.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종이비행기를 보는 것 같았다. 바람은 올라탔은데 어떤 바람인지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힘없는 비행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몰랐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인지 정말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대신 화내며 싸워주고 싶었다. 자꾸만 우려하던 결말로 들어서는 것 같아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진짜 이대로 끝나면 저 감독 가만히 안 둘 거야. 당사자에겐 세상 아픈 이야기를 너무나 뻔한 안주거리로 만든 거면 진짜….’
마른침을 삼키 들썩거린 건 곧 다가올 엔딩 때문이었다. 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제발 잘하길 바라면서 몸도 마음도 긴장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머니 속 핸드폰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게 만들며 영화 ‘세계의 주인’이 끝났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눈물이 흘렀다.
이 감독은 뛰어난 사람이다. 인간의 미묘한 변화를 단번에 보여주며 이야기를 마친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될지 안될지는 주제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던졌다.
쪽지의 주인은 ‘누구나’였다. 알 수 없어서 불안했던 인물이 모두일 수 있어서 주인이의 당찬 용기에 힘을 채워주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도 남자도 그 누구도 예외 없어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어둡고 단단하고 울렁거리게 두렵던 속을 후련하게 게워낸 주인이의 진짜 평안함이 스크린을 뚫고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인이는 고통에서 진정으로 해방되었다.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스레 쫓아가는 마지막 신은 전반부에 나왔던 장면과 흡사했지만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일 만큼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그 아이의 벅찬 마음이 내 심장으로 흘러왔다. 손끝으로 퍼지는 감응과 감사.
심장이 폭발하듯 격하게 누군가의 내일을 응원하며 눈물을 닦았다.
‘네가 나보다 훨씬 용기 있네. 넌 이제 진짜 네 세계의 주인이야’
한참을 앉아있었다. 움직이는 화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옆자리의 어떤 이에게 쏠려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영화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 그녀의 훌쩍임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혹 흐느낌으로 바뀐다면 안아주어야겠다 마음먹고 기다렸다. 어쩌면 그녀는 같은 아픔을 겪었을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그녀는 나보다 먼저 영화관을 나갔다. 나는 그녀를 보내고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맥없는 침울함은 아니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주제였지만 쪽지를 읽던 여러 목소리에 그 어떤 엔딩보다 경탄했다.
영화의 미래까지 염려했던 어리석은 나까지 치유해 준 이 영화의 모두에게 진심 존경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