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화해에 엄마가 필요한 순간
달라도 너무 다른 첫째와 둘째의 불협화음은 가끔 한 번씩 봄날의 포근한 휴식기가 있을 뿐 내내 늦가을과 한겨울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단체생활에서의 규칙은 그 어떤 개인사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둘째의 신념은 매번 자신의 일정에 밀려 집안일을 미루고 있는 큰애와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돌이표를 찍고 있었다. 둘째에게 언니 좀 봐주라고 하니 “언제까지요?” 이렇게 물으니, 대답을 못 했다. 아마 큰애에게 물었어도 대답을 못 했을 것이다. 큰애는 아예 마지노선이 자꾸 변동되고 있었으니.
둘째가 화가 나서 짜증스럽게 토로했다. “엄마, 나는 언제까지 언니랑 이렇게 살아야 해요? 이런 식으로 계속 봐야 해요?”
“아니. 안 봐도 돼. 안 맞으면 분가해서 살아. 그리고 안 보고 싶으면 평생 안 봐도 돼”
“진짜요?”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가족이라고 무조건 봐야 하는 건 아니야. 보기 싫으면 보지 마!”
동거가 둘째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그 스트레스가 큰애에게 더 날카로운 감정으로 전달 된다면 나는 두 사람의 별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행복하지 않은 일에 무조건이라는 건 없다. 둘째는 내 대답에 짐짓 놀란 듯 진짜냐고 다시 물었고 나는 확답해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니들은 안 봐도 되고, 나는 니들을 각각 따로 만나면 된다고.
이런 나의 대처에 그동안 수없이 들어온 평가가 있다.
‘자기는 진짜 강하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는구나!’
그 평가를 이렇게 흡수했다. ‘그래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 남들도 아는구나!’라고.
둘째의 토로에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실천하고 살았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살고. 그렇게.
나는 전남편의 부모랑 5년 가까이 살아냈다. 살아냈다고 표현한 것은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절대 만만치 않은 동거였기에 후회를 조금 섞어 나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혼을 한 후에도 내가 그들과의 동거를 시작한 것은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을 청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두 노인과 나의 시작은 그 사람들의 아들로 인해서였지만 20여 년 가까이 부대끼는 세월 동안 남편의 존재를 지우고도 두 노인과 나 사이의 서사는 적지 않다. 언제나 나를 믿어준 고마움, 자신들의 소중한 돈을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를 위해 써준 일. 어떤 이는 그 모든 행위가 결국 자신들의 아들을 위해서 한 거라고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나는 내 감정만 보았다. 남편은 진짜 남의 편으로 쉽게 지울 수 있었지만, 그 두 사람에겐 애처로운 짠함과 동시에 갚지 못한 마음의 부채만이 남아 있었기에 나는 80이 훌쩍 넘은 두 노인과 내 집에서의 동거를 결심했었다.
동거 중에도 시어머니는 한 번씩 아들의 삶에서 밀려난 자신의 현재가 억울할 때마다 지나간 과거를 곱씹었고, 그런 이득 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그만두기를 종용했었다. 시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너는 강해도 너무 강하다” “내가 강하니까 두 분과 사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그만하실래요?” 내 단단함이 두 노인에게는 유리하기도 불리하기도 했다.
전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나의 책임은 끝이 났고, 나는 마음의 빚을 완전히 갚았다. 그리고 전 남편의 가족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그때부터는 오롯이 내 마음만 보고 싶었다. 인간관계에서는 뚜렷한 객관화가 필요하다. 남편은 싫었지만,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아빠와 닮은 점은 내가 흉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모의 유전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시부모들과의 친밀이 강했다고 그들의 자녀들과의 관계를 무조건 좋게 유지할 필요는 없다.
서울에서 살고 있던 자식들에게 나는 동거에 대해 시작 전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 나의 딸들과 아들은 오로지 나의 안위만 걱정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왜 이제 남인 사람들을 엄마가 책임지냐고, 다른 자식들 다 잘살고 있으면서 자기 부모를 왜 남인 엄마한테 맡기냐고 흥분해서 반대했지만 나는 내가 결정한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고 또 선을 그었었다. 이 아이들은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니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5년 뒤 모든 일이 정리되고 서울로의 합가를 준비할 때 아이들이 그랬다. “우리 엄마는 빚지고는 못 사시나 봐요. 그래도 장해요.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계속계속 사세요”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이해타산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온 서사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그래서 만들어진 신념이 다르니 타인의 생각은 오롯이 타인의 감정과 경험이 만든 것이리라. 나는 지금도 여전히 내가 중심인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둘째의 물음에 그렇게 답할 수 있었다. 다툼만 있는 관계에 끼어들어 가기가 싫었다. 어색하고 냉랭한 기류를 매번 느껴야 한다면 다른 가족들 그 누구도 평안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로서 나는 이 답에 조금의 치료 약을 섞었다. 가족은 그런 것이다. 과하게 화를 내다가도 아주 작은 일에 또 서로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한다. 큰애는 떠들고 싶을 때 직장의 고단함을 아는 둘째가 안성맞춤의 대화상대임을 알고 있고, 둘째도 동생들한테는 차마 못 할 말을 언니한테 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안 보고 사는’ 최후의 선택도 허락받았으니, 둘째는 답답함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서사는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무리하게 당기도 싶지는 않았다. 서로 안 보고 살아도 행복하다면야 나는 행복한 딸을 둘이나 갖게 되는 것이니 손해가 없다는 것이 나의 계산법이다.
둘째는 감정적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 낯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내 허락으로 둘째의 맺힌 마음이 풀어져서 어쩌면 나의 우려와 달리 큰애와 부딪히더라도 참아낼 만큼이라고 느껴 지금까지처럼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언짢은 감정을 지워버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나는 조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둘이 너무 달라서,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도 해결을 위한 행동 패턴도 너무 달라서, 그 다름을 서로가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내 딸들은 아직 어린가 보다.
인경혜수! 화가 날 땐 엄마를 찾아. 엄마는 너희의 절대적인 아군이야.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