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을 쓸 수 없는 곳이 있는게 말이 되냐?
‘현금 없는 버스’ 라는 문구를 버스 앞, 커다란 LED전광판에 써 놓고 자랑스럽다는 듯, 번쩍번쩍이며
달려가는 버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이함은 코로나가 본격화 된 뒤,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던
‘사회적 거리두기’ 라는 문구 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저거는 잘못 쓴 거 아닐까? 주어가 없으니까 사람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 등등을 하다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더니 헛것이 다 보이는 군! 하고 차라리
내 자신을 부정했던 기억을 소환했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현금 없는 버스’ 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의
불편한 감정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항상 현금을 들고 버스를 타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으니까.
여전히 아버지처럼 현금만 쓰는 노인들이 아직도 많을 텐데..
물론 대안은 있다고 한다. 계좌이체를 통한다나 뭐래나?
금융거래를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끝내는 시대에도 여전히 은행창구에 가서 번호표 뽑고 금융거래
하는 노인들이 여전히 많다. 은행에 직접 가서 금융거래 하는 노인들에게 계좌이체가 말처럼 쉬울까?
물론, 버스 한 번 타고 난 뒤, 계좌번호 받아서 아침 일찍 은행에 가서 번호표 뽑고 창구 직원이
계좌이체를 해주면 된다. 하지만, 노인들이 한 번 외출하면 얼마나 에너지와 기력을 쓰는지 알면
그런 요구를 쉽게 할 수는 없을 거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지어진 우리나라는 70년 만에 세계 10위 안에 드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장위주의 정책이 이루어졌고, 우리들은 성장의 가치에 함몰되기 시작했다.
국가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던 시절에는 성장가능성이 없는 행위는
매도당하기도 했다. 70년대 히트곡인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 가 금지곡이 되었던 이유는
‘산업의욕’ 저하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근로의욕도 아니고, 산업의욕이라니...
일 안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한가하게 기타치고 노래하면서 노동자를 유흥에 빠져들게 현혹하는
노래였다나 뭐래나? 뭐, 군사정부 시절에 일어난 해프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우리는 성장가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았다. 그 결과는 새 천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가 it강국이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새로운 성장 엔진을 얻어 it에 집중 투자했기에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it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실을 모든 사람이 딸 수 있었을까? 과거 성장위주의 정책을 펼칠 때도 뒤쳐지거나
도태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태된 부류는 그냥 버려두고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겐 성장이 너무나 절실했으니까.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성장을 견인한 이들이 지금의 노인세대이다. 성장의 가치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때로는 함몰되어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하거나 박탈당하면서도 국가발전이라는 가치
앞에 개인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시대를 견뎌낸 이들이다.
선진국이 된 현재, 우리는 노인세대에게 어느 정도는 부채감을 갖아야 하지 않을까?
누구 한 명의 지도자가 지금의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다. 현재의 노인들이 젊은 시절에
피땀 흘려 만든 거다. 고속성장기에 취업 걱정 없이 살았던 호시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권, 민주화가
제대로 안 되어 있던 시절에 그들이 겪었던 고초는 전태일이나 여러 민주화 운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을 헌신했던 그들이 이제 은퇴하고 힘이 없어 영양가가 없으니, 그들의
사정은 본체만체 할 것인가?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이 대접 받고, 대우해 주는 나라가 보다 더 국가에 대한
애국이나 충성을 더할 것이다. 노인을 푸대접하고, 선거철에나 대우해 주는 나라에서 누가 노후를 보내고
살고 싶겠는가?
이젠 선진국이 되어, 지금의 젊은 세대가 은퇴할 때쯤에는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은퇴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할 지 모른다. 돈 많은 은퇴자들이 노인을 잘 대우해 주지 않는 나라에서 여생을 살고 싶을까?
돈 싸들고 다른 좋은 나라에 가겠지. 가끔 일부 노인들이 보이는 안하무인식의 언행에 치를 떠는 젊은층이
많은 것도 이해가 된다. 그게, 사실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지금과 달리 형제가 6~7명 되는 집이 흔했던
시절에 따뜻한 부모의 정을 느끼기도 어려웠고, 제대로 정규교육을 마치지 못한 이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그런 이들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
노인으로서 대우할 것은 대우해야 하고, 버스에서 현금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하는 정도는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지하철처럼 공짜로 타는 것도 아니고, 돈 내고 타는 건데....
어려울 것 없다. 예전처럼 돈통 하나 구비해 놓으면 된다. 이젠 사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작은 거 하나
카드단말기 옆에 달아 놓으면 된다. 고급스러울 필요도 없다. 가까운 다이소에 가서 천 원짜리 돈 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저금통 비슷한 거 하나만 구비해 놓으면 안 되겠니? 동네마다 다이소는 다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