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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Jul 03. 2023

백온유의 '유원'을 읽고

기억도 안 나는 과거가 발목 잡을 때..

‘유원’은 작품 설정이 매우 독특합니다. 기억도 거의 안 나는 아기 때, 일어난 일이 성장과정 내내 영향을 

주고, 때로는 발목을 잡는 다면, 그 사람은 과연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설정 자체도 독특하고 인상적이지만, 스토리텔링 측면에서도 주인공을 가혹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 던져놓고, 하나씩 매듭을 풀어가는 과정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영화는 아니지만,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조차 희미한 과거의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도와준 덕분에 내가 

살아서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 기억은 내게 큰 위안이 될까, 아니면 트라우마가 되어 발목을 잡을까요?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입니다. 그중 한 명은 친언니인데 나를 살리고 죽었고, 다른 한 명은 나를 살리고 

장애인이 된 뒤에 내 주위를 계속 맴돕니다. 은인이라는 사실을 담보로 현실의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합니다. 그리고,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은 뉴스로 크게 보도되어 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그 사건을 떠올립니다. 그 지나간 화재사건은 나의 현실을 지배하고, 때로는 

과거에 갇히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다는 것은 얼마나 가혹할까요?     


주인공 유원은 두 사람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살아남아 고등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12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버린 꽁초로 인해 11층에 사는 유원에 집에 불이 나고, 동생 유원을 살리기 위해

언니는 아기였던 동생을 이불 포대기에 둘둘 말아서 11층 높이에서 던지고 자신은 병원에 후송 중 

사망합니다. 11층에서 던져진 아기 유원은 지나가던 아저씨가 받아서 자신을 살리고, 그 아저씨는 그 

충격으로 한쪽 다리가 망가지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희생을 통해 살아난 유원의 생존은 

각 종 미디어에 화재가 되어 방송되었기에 사람들은 유원을 만나면 늘 그 화재사건을 언급합니다.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언니에 대한 부채감은 유원을 항상 짓누르고, 자신이 잘 성장하는 것은

유원 자신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죽은 언니가 살지 못한 삶을 보상하듯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느낍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을 살린 아저씨는 툭하면, 집에 찾아와 은인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내세워 

금전을 요구합니다. 그 앞에서 쩔쩔매는 부모를 바라보는 유원은 그게 자신이 살아난 대가로 유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부모가 대신 지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자신은 기억도 거의 못하는 과거의 어떤 일이 어려서부터 계속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유원이 겪은 일은 어쩌면 미담처럼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저 가십거리일 뿐입니다.

쉽게 말을 꺼내면서, 유원에게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네가 그 애 구나.’라는 말이 얼마나 유원의 삶을

굴레에 가두어 두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생각이 없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어차피 가십거리로

보았던 뉴스였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한 미담에서 덕을 본 당사자는 평생을 부채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 같은 무게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인도 감당하기 힘들 이런 상황을 어린 유원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유원은 혼자 있는 게 편안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유원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떠올리니까. 그럴 때마다 죽은 언니가 

떠오르고 또 미안하고, 어떤 때는 죄책감마저 느껴지니, 사람들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됩니다.    

 

그런 유원이 우연한 기회에 친해진 친구가 하필이면 자신을 살린 아저씨의 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이 유원을 살린 아저씨였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자꾸만 유원의 가족 앞에 나타나 금전적 요구를 자꾸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원에게 아저씨는 절대 회피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이 현재 살아 있는 것은 아저씨가 자신의 한쪽

다리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고 11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유원이를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저씨가 무리하게 금전적 요구를 해도, 무리하게 tv출연을 강요하는 아저씨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딸이자 유원의 친구인 수현을 통해 아저씨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은인을 빙자한 다양한 착취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을 알게 됩니다.

현실을 피해 나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아저씨를 부정할 수 없기에 아저씨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아저씨가 11층 높이에서 떨어지며 무거워진 나를 받느라 한쪽 다리가 으스러질 

정도로 그 무게감이 아저씨의 삶을 짓눌렀듯이, 자신도 아저씨로 인해 삶의 무게감이 너무 무거워 힘들다고...

아저씨 앞에서는 쩔쩔매던 유원이 그런 말을 하자, 당연히 아저씨는 놀라기도 하고, 충격을 받고 

사라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유원은 눈물을 흘립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지만, 이타심으로 자기 몸을

희생하며 유원을 살린 아저씨와의 관계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희생과 감사, 보답은

진작에 지난 일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은인이라는 기억하나로 기생충처럼 사는 아저씨니까요.

유원과 부모님, 아저씨 자신을 위해서도 이제는 이별이 필요한 순간, 과감한 결단은 힘듭니다.

이젠 아저씨가 밉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살린 사람에게 상처될지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유원의 결단은 성숙한 이별과 악순환의 차단이라는 성숙함을 

낳으면서 트라우마처럼 유원을 발목 잡았던 화재사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유원은 이젠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수현을 통해 시야를 바꾸고, 다양한 시야를 확보했을 때, 확장되는 생각의 폭과 시야는 유원을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이젠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꾸려합니다.

넓은 시야와 세계관을 갖는 다면, 언니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은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인생에서 

어쩌면 과거의 기억일 뿐, 현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는 알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세계관이 더 넓어지면, 과거는

현재를 더 이상 발목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유원은 자신을 발목 잡던 과거의 기억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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