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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Dec 28. 2022

'최후의 라이오니'를 읽고

두려움을 결함으로 여기지 않을 때 보이는 인간적인 것들에 대하여

1998년에 만들어진 ‘딥 임팩트’라는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뒤, 너무 몰입을 한 탓일까요? 가끔 

이상한 상상을 합니다. 저의 죽음의 배경에 지구 멸망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누군가를 위로해 줄 여지가 없는 분위기와 모든 것이 소멸로 향해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맞는 죽음은 너무 암울하고, 아무 희망도 없는 지옥에서 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라이오니’를 읽은 뒤로는,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가 마지막 순간에 큰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위로할 수도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죽음이라면, 어쩌면 꽤 근사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멸망의 순간

셀이 크게 웃고, 라이오니와 함께 그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한 장면처럼 말이죠.

 

공포라는 감정을 인간의 결함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의 공포를 알기에 타인 공포를 이해할 수 있어 

연민을 갖고, 연대를 할 수 있는 감정이 공포라면, 단순히 결함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의 공포와 타인의 공포가 다르지 않기에 우리는 위기의 순간 서로에게 좀 더 마음에 와닿는 위로를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타고난 표현력이 부족해도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겠지요. 소설 속 ‘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소멸의 공포라는 결함을 갖고 있기에 셀과 기계들 

옆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소설 속, 불멸인들이 복제인에게 자의식을 전송하는 방식으로 죽지 않는 삶을 갖게 되자, 인간들은 

원초적인 죽음의 공포를 잊어버립니다. 죽음도 없고, 그에 따른 공포심도 없는 그들은 완벽해 보입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후천적인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닥치자,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공포를 이겨내려 하는 모습은 비교적 현실적입니다. 공포에 대한 기억을 잊은 이들은 

커다란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 닥친 현실과 공포에만 함몰될 것이고, 루머라고 짐작이 

되더라도, 혈액을 얻어 면역력을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이 살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갖은 공포와 타인이 갖은 공포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평상시에 갖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이타심의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기 때문이겠죠. 그런 세상에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자만심에 빠졌던 3420-ED행성의 인간들처럼 자신만 살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고, 

자신만 살기 위해 행성에 남을 자들에 대한 연민도 없이 혼자만 도망가는 현실이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요? 감정 없는 문명의 발전이 얼마나 치명적일까 상상되지 않나요?

 

기술의 발전은 거스를 수 없고, 더 놀라운 기계와 AI가 등장할 것입니다. 기계나 AI가 자의식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 삶 속에 기계와 AI는 깊숙이 들어올 것이고, 어쩌면, 우리와 한 가족처럼 살게 되어,

가족과 아닌 것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마저 붕괴될지 모릅니다. 먼 훗날, 정말 기계와 AI가 세상을 지배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인간의 통제 속에 있을 것이고, 인간의 특성상 자신이 갖고 있는

장난감에 애정을 주듯이 감정이입을 할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에 들어온 기계와 AI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부여할 것입니다. 우리가 갖은 감정을 고스란히 갖고 보다 인간적인 세상의 틀 안에서 기계와 AI와 함께 

문명을 발전시킨다면 공동체가 함께 행복하고, 폭력 없는 이타적인 세상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능합니다. 그런 세상에는 기계가 AI가 혹시나 인간을 흉내 낸 폭력성이 쉽게 나타나기 힘들 

것입니다. 다만, 기계와 AI를 이용하는 인간들이 문제가 될 뿐...

 

기계들을 구출하겠다는 약속에는 실패했지만, 자의식을 갖은 기계들의 소멸에 대한 공포를 달래 

줄 복제인을 보내서 최후를 같이 함께 한 라이오니 같은 복제인이 있다면, 그것을 만들고, 통제했던 

우리가 그 감정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 세상이라면, 문명이 고도로 발전되어도 우리의 

우려와 달리 인간적인 세상은 이어지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공포와 인간적인 유대감을 잘 버무린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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