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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Dec 02. 2022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고

죽음이 남기고 간 그 허무함.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하여..

죽음은 사실 죽은 이에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실에서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세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쪽 세상의 문제이지,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죽음은 산 자, 남은 자에게만 의미가 남을 뿐입니다. 죽음은 산 자들의 흔적입니다. 더군다나,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자살의 사례라면 우리는 그

죽음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의미를 그 죽음에서 찾을 수 있을지 도 모릅니다.


죽은 사람의 집 청소를 가면, 공통적으로 지독한 냄새와 죽은 자가 남기고 간 피와 오물이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갑니다. 지은이는 옷을 크기, 종류, 색깔 별로 깔끔하게 구분해 놓은 20대 

아가씨가 자살한 집의 깔끔함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순간을 위해 난방 배관에 묶어 놓은 빨랫줄과 혈흔을 모두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람의 죽음은 처참하고 지독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위해 준비했던 착화탄과 불을 붙이기 위한 도구들을 깔끔하게 분리수거하고 난 뒤, 

자살한 이는 자신의 죽음이 깔끔한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랐을지 모르지만, 역시나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지독한 냄새와 피, 오물은 여전합니다.

죽음 뒤, 우리 모습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그런 동물의 사체와 어쩌면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죽은 뒤,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악취만 풍깁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의뢰하는 경우는 대부분, 고독사나 자살인 경우가 많아 사망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 악취는 더욱 강렬하게 내뿜습니다. 그 지독한 흔적은 

남은 자들에게 자연스레 죽은 자의 삶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 상상 속에서 우리는 그가 삶을 포기하게

된 계기를 통해 우리 삶의 유한함을 자각합니다. 죽은 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우리도 겪습니다. 다만,

그 무게감이 달랐을 뿐이죠. 죽은 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고통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고민합니다.

죽은 자의 처절한 고독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고독이 있기에 상상이 가능한 것이고,

죽은 이의 슬픔을 보았다면, 역시나 자신의 내면의 슬픔을 통해 그 슬픔을 투영하고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저 자의 삶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지면,

역설적이게도 죽은 자의 모습을 통해 삶의 유한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 유한함의 끝에 삶의 소중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갖는 극단적인 한계성은 안타까움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냉장고에서 ‘쌍쌍바’ 하나를 남겨두고 간 아가씨처럼 말이죠. 수저 한 쌍, 칫솔 한 쌍, 밥공기 한 쌍 등등

집안의 모든 살림이 한 쌍이었던 아가씨의 죽음 뒤에 덩그러니 쌍쌍바 하나만 남은 냉장고의 모습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그녀가 버리지 못했던 절박한 그리움의 흔적이 보입니다.

어쩌면, 그 그리움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그녀를 이끌었는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삶의 애착이 뚝뚝 떨어지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런 감정이 들었을 때, 선택한 죽음이라면 그나마

고통이 덜했을 텐데... 하필이면 죽는 순간까지도 떠난 남자가 돌아와 같이 나눠 먹기 위해 남겨둔 듯,

냉동고에 달랑 하나 남은 쌍쌍바는 가슴이 먹먹하게 만들어집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던 어느 가수의 말처럼 우리네 인생은 의도치 않게 시작되어, 예기치 못하게 끝나기도

하기에 미련이 남을 수 있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쌍쌍바 하나는 무언가 정리하지

못하고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떠난 사랑에 대한 버리지 못한 애착이었는지, 애착할 곳을 잃어버린

마음의 공허함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죠.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가 히트한 것도 이래서

였을까요? 미완성을 부정할 수 없으니, 노래를 불러서라도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죠.


죽음은 삶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주는 우리 삶의 최고의 고통입니다. 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도

때로는 죽음 못지않을 정도입니다. 죽은 형의 집을 청소해 달라는 동생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형의 

방에 들어가서 어깨만 들썩이며 숨을 죽인 채 10분을 넘게 우는 모습에서 죽은 형이 동생에게 남기고 

간 사랑의 크기가 짐작이 됩니다. 형이 남기고 간 사랑으로 동생은 형을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만큼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가치는 더욱 커집니다. 커진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자연스레 커지게 됩니다. 죽은 형도, 남겨진 동생도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어쩌면 

죽은 형이 동생에게 남기고 간 의도치 않은 선물이라면 너무 과장일까요? 죽은 자나 남겨진 자가

죽음이 남기고 간 '죽음 같은 고통'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유한한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고, 사랑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죽은 뒤,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같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통해서 때로는 삶의 희망을 볼 수 있기에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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