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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한인생갱생 Jan 26. 2023

[고시원16] 떫은 명절

음식만 맛있다



땅, 땅, 땅! 죄인은 들어오시오!


민족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이 다가왔다.

학생신분도 아니고, 이룬 것 없이 붕 뜬 나이의 나에게 명절이란, 온 친척이 모여 지난해를 심판하는 자리 같았다.

이를 어쩐다. 작년엔 정말 한 게 없다. 뭘 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저 원대하지만 너무 높아 닿지 않는 목표만 쥐고 있었다.


이번 설에는 인원 변동이 있었다. 일단 사촌 언니가 작년 11월에 결혼해서 오지 않았고, 큰아빠는 감기, 작은엄마는 친정아버지가 아프셔서 불참하셨다.

사촌오빠는 며칠 전 혼인신고한 새언니를 데려왔다. 학생 때부터 교회에서 자주 봤던 언니라 얼굴은 익숙했다.

모인 식구는 나 포함 총 12명. (작은할아버지, 작은 할머니, 할머니, 큰엄마, 사촌오빠, 새언니, 아빠, 엄마, 나, 동생, 작은 아빠, 사촌동생)

11시에 우리 집에 모여 세배하고 점심과 다과를 먹은 뒤 해산.


늘 간단하게 지내서 오랜 시간 두드려 맞지는 않겠지만 명절 카운터 몇 방만 맞으면 기가 빠진다.

다행히 친가에서는 작은 할머니와 몇 마디 나누고 끝냈다.

뭘 할 거냐고 물으셔서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떨떠름한 표정이셨지만 큰 결심을 했다고 해주셨다.







오후엔 아빠랑 연희동(친어머니 외가)을 들렀다.

외할아버지는 나만 보면 엄마가 너무 생각난다고 한다.

친가에선 모두 아빠랑 너무 닮아서 깜짝깜짝 놀라지만, 외할아버지는 유일하게 슬픈 눈으로 내가 엄마를 너무 닮았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내 말에 별말씀 없으셨지만 (이미 알고 계시기도 하고 열심히 하라고 하셨었다)


작은삼촌은 굉장히 인색한 태도로 리조트 같은 곳에 취업이나 하라고 했다. 뭐가 더 마음에 안 드시나 시종일관 인색한 태도가 내 속을 긁었다.

촌들은 맨날 말로만 보내주겠다고 하고 세뱃돈은 안 주신다.ㅋㅋㅋㅋㅋ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내가 외할아버지 재산 좀 덜어갈까 봐 그런가. 정작 나는 관심도 없는데.

법적으로 돌아가신 엄마 몫 1/3을 내가 받을 수 있지만, 할아버지가 내게 조금 남겨주신다고 해서, 주신다면 주시는 대로 받을 예정이다.

외가에서 나 크면서 해준 것도 없지만, 나도 딱히 명절 때만 찾아뵀으니 별로 받고 싶지도 않다.

친척집 어디를 가나 온전히 환영받진 못하는 것 같아서 조금, 많이 슬펐다. 나는 누가 내 집에 오던지 온전히 환대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다녀온 뒤 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에 서천(두 번째 어머니 외가)으로 가서 한 밤 자고 왔다.

가는 길에 예산에 들러 백종원 아저씨가 새로 마케팅한 시장을 방문했다. 역시 트렌디하고 레트로 하게 잘 꾸며놨고 사람도 많았다.

서천에선 외할머니 빨리 시집이나 가서 부모 짐을 덜으라고 했다. 사실 이 말은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좀 상처였다. 

친 손주가 아니니까 부모한테 더 이상 의지하지 말라는 눈빛과 말투가 아주...

하긴 엄마가 같이 가면 좋아해서 가끔 가는 거지, 서천에선 진짜 가족 같은 느낌은 받은 적이 없다.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따가운 시선. 애 딸린 남자의 '애' 포지션을 맡고 있었으니. 누군 맡고 싶었냐고. 나도 우리 엄마한테는 공주였는데.

성공해도 더 이상 안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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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스물여섯 살이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다.

의대 갈 수 있다는 보장이 것도 아니고...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나를 꺼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나의 확실한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애매하게 먹고살길" 바란다. 


반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차라리 기대가 없는 게 부담도 덜하다.

속 빈 응원보다는 무관심이 감사하다. 물론 실패를 거듭하면 손쉽게 힐난의 화살로 변하겠지만...

이번 명절을 잘 돌이켜보며 한 해 동안 더욱 성장해야겠다.


여러분의 설날은 어땠는가, 나는 그냥 좀... 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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