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밥먹듯이 하는 사람 여기여기 모여라’
1등으로 붙을 사람,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이런 점을 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끈기가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많은 거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아직 취향 발굴 중인 거니까.
포기왕 기질에는 생각의 길이가 남들보다 좀 짧은 것도 한몫한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우선 지르고 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돈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당장 시작하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행동파인 내가 보통 총대를 맨다. 깊은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면 뒤탈이 나기 마련이지만, 탈 날까 걱정하다가 해보지도 않는 건 더 싫다.
생각의 길이가 곧 걱정의 깊이가 될 때가 있다. 걱정하다 보면 걱정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안 놔준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 발목까지 물어 안 놔주기도 한다. 생각이 발목을 덮석 물기 전에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원을 선택하는 것만큼은 달랐다. 그때만큼은 길게, 아주 오래 생각했다. 한편으론 걱정이 내 발목을 잡아 줬으면 했다. 공부를 위해 학교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취업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기에 그리 탐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사의 길을 선택했다. 석사의 길만 선택한 게 아니었다. 학위로 채울 수 없는 경력도 채우고 싶었다. 가고 싶었던 회사의 계약직에도 지원했다. 풀타임 대학원생이자 풀타임 직장인이라는 끔찍한 2년의 시작이었다.
조금 천천히 가면 어디가 덧난다고, 모두가 말리는 그 길에 들어섰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입사할 때만 해도 회사와 학교가 30분 거리로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가 학교와 1시간 반이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 회사에 가고, 오후 5시 반이면 미친 듯이 뛰어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지하철역에 가고, 또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학교를 갔다. 택시, 버스, 지하철을 코스 바꿔가며 여러 차례 시도를 해봤지만 시간 안에 도착하려면 택시-지하철-택시 코스가 그나마 제일 빨랐다. 10시 반쯤 수업이 끝나면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갔다. 끝이 아니었다. 11시부터는 다시 책을 펴고 과제를 해야 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하루에 대중교통을 6번을 갈아타고, 잠은 5~6시간 정도밖에 못 자다 보니 난생처음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쓰러지자마자 금방 벌떡 일어나긴 했다. 탈탈 털고 그대로 수업 들어갔다.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었다. 무엇보다 친구도 가족도 남자 친구도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포기를 밥먹듯이 하는 나라도, 오래도록 고민한 이 선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걱정을 많이 하시던 엄마는 회사든, 석사든 둘 중 하나는 포기했으면 하셨다. 하지만 그때마다 "괜찮아! 내 선택이니까 내가 책임져!"라고 엄마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결국 나는 2년을 해냈다. 석사 논문도 통과했고, 원하는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취직까지 했다.
그런데 뿌듯하지 않았다. 그 2년이 기억나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밤늦게 오르막을 힘들게 올랐던 기억, 택시가 안 잡혀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 아무리 서둘러도 지각할 수밖에 없어 매일같이 뛰었던 기억. 발버둥 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조금만 더 느긋했으면 이렇게 깜깜한 기억만 남기지 않았을 텐데. 원하는 걸 조금 더 늦게 가져도 되니 숨 좀 쉬면서 살 걸. 쓰러진 그 날 포기할 걸. 생애 두 번째로 코피 나던 그 날 그만 둘 걸.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봤자 뭐할까.
반짝반짝 빛나야 했던 내 청춘에게 미안하다. 반짝이는 제 청춘을 애써 못 본채 하고, 학원으로, 스터디 카페로, 방 안의 책상에 앉는 그대들의 청춘도, 내 청춘도 안쓰럽다.
물론, 그때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석사를 못 끝냈을 수도 있다. 더 늦게 취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이 또 다른 후회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어떤 기억도 남지 않는 2년을 살고 싶지 않는다.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 포기왕으로 돌아간다. 포기해도 괜찮다. 맞는 길을 찾아가는 중이니까. 남들이 뭐라든 나만의 속도를 만들어 가자. 포기의 왕좌에 당당히 앉아라. 고개를 들어라. 전국의 포기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