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 바리새인들아!

by 안젤라

2025년 10월 28일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 바리새인들아!


<서문>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두 개의 비유를 연속으로 말씀하신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1~8절)와 “스스로 의롭다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설교는 이 둘을 따로 다룬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끈질기게 기도하라”를 설교하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겸손하게 기도하라”를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비유를 “그러나”로 이어 놓으셨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귀결될 수 있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나, 그 기도는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한다.”


1. 첫 번째 비유: 끈질기게 기도하라

불의한 재판관은 정의감도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부의 간청이 하도 끈질겨서 귀찮은 마음에 그 간청을 들어준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8:7) 여기서 끝났다면, “기도하면 다 응답받는다”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다음에 이어서,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예를 보여주신다.


2. 두 번째 비유: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의 예화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기도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율법을 지켰고, 헌금을 냈고, 금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였느니라.” 반면 세리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충격받지 않고 받아들인다. 기도의 양이 아니라, 기도의 근간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도들은 이 예화를 그저 2천년 전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유대인 바리새인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오늘날처럼 율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된 우리는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하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 1년간 매달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데 회개하라는 말씀은 가뭄에 콩나듯 아주 적었다. 기도원에서 듣는 설교다 보니 설교자들이 기도를 강조하고 그 기도 성소에 모인 수많은 기독교들이 ‘주여, 주여’ 하며 열심으로 기도를 드렸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 기도 처소에 오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였다.


음... 과연 그럴까 생각된다. 물론 나도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당장 우리 나라의 여러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고 불리하게 진행되는 것은 작년에 그렇게 많이 기도하던 우리 기독교도들의 기도를 무색하게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도 기도하였고 그는 예배 생활, 십일조 생활, 금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듯 보였다. 마치 부자관원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것에만 초점을 맞춰서 기도하는 것은 자기 의 위에서는 하는 기도이다. 반면, 세리의 기도는 자신은 죄인이고 아무 공로없으니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회개를 근간으로 한 기도이다.


3. 정의를 외치는 기도의 함정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공의와 정의를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한 때 말세에는 과부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더욱 많을 것이고, 불의한 재판관처럼 공정한 판정을 하지 않고, 판정 자체를 미루는 이들이 많아서 불의한 재판관 때문에 말세를 언급하셨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비유와 연결하여 보니, 예수님은 곧바로 “자기 의의 기도”에 대해 경고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깊이 묵상해 보니 “혹시, 우리가 바리새인의 마음으로 정의를 외치며 지금까지 응답이 없다고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었다. 정의는 옳다. 기도도 옳다. 하지만 자기 의 위에 세워진 정의와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닮아 있다. 성전은 크고, 프로그램은 많고, ‘의로운 말’은 넘친다. 그러나 회개가 없고 자기 만족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교회도 많고, 성도도 많고, 선교는 말할 것도 없다. 이만하면 주님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생각하는 부유한 마음이 있다. “부족한 것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순간, 기도는 미지근해 질 수 밖에 없다. 고난과 연단, 그리고 가난한 상황과 깨어진 심령이 없다면 기도는 간절하지 않게 되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요한계시록 3장: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고

예수님 초림 때는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다. 이런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예수님은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으시며 바리새인들의 믿음 생활을 고발하였다. 계시록을 통해 예수님 재림 때와 관련하여 라오디게아 교회에 “너희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라고 책망하셨다. 미지근함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미지근한 마음은 바로 자기 만족에서 온다. 회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바리새인이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한 그 고백이 라오디게아의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는 고백으로 반복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믿음을 보겠느냐”의 진짜 대상

예수님의 질문인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다. 기도하고, 정의를 외치고,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에 이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예화를 같이 묶어서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마치 과부의 끈질긴 기도 예화를 들은 부자관원과 같은 바리새인이 자신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반박 또는 자부심으로 이야기하는 그 마음에 찔림을 주시며 바로 잡아주시는 느낌이 있다. “너희는 열심히 기도하고, 정의를 외치지만 그 기도 안에 회개와 겸손이 있느냐?”라고 책망하시는 듯 한다.


6. 마지막 시대의 기도자

말세, 곧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하는 자”를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 즉, 회개와 겸손 위에서 기도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는 세리처럼 고개 숙여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말세에 내가 찾던 믿음이구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옥중에서 시작된 두 번째 전쟁: 예언적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