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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법정과 신앙 고백의 무게감을 깨닫다

by 안젤라

하늘 법정과 신앙 고백의 무게감을 깨닫다


2025년 3월 14일


요즘 헌법재판소에서의 거짓 증언들을 들으며, 입술로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 10절을 다시 읽으며, 입술로 시인한다는 것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늘 법정에서 하는 증언과 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이 단순한 말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신앙고백도 단순한 말이 아니다. 만약 거짓을 증언하면, 위증죄로 처벌받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시인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적 위증이 된다. 입술의 시인은 영적 법적 효력을 가지며,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나에게 말한다. “굳이 그렇게 열심히 믿을 필요가 있나?”, “그냥 매주 교회 가고, 헌금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천국 가면 되지”, “성경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고 하잖아.”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 정말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1. 헬라어 ‘시인하다 (ὁμολογέω, homologeó)’의 의미


로마서 10:10에서 ‘시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ὁμολογέω (homologeó)”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이는 “함께 말하다, 동의하다, 선언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법정에서 증인이 “예, 그것이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선포하신 것에 대해 동의한다는 합법적 선언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공적인 법적 선언과 같은 것이다. 마치 재판에서 증인이 “예, 그것이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입술로 시인한다는 것은,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시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증언(위증)이 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6-37)


믿음 없는 입술의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 증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고백을 해야 한다.


2. 거짓된 시인은 하늘 법정에서 위증이다


나는 한때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 말했다. 그러나 정말 마음 깊이 믿고 고백했는가? 아니면 단순히 교회 분위기에 휩쓸려 형식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는가? 나는 하늘 법정에서 스스로 위증한 것은 아니었는가? 예수님은 더욱 강하게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이 말씀은 충격적이다. 단순히 “주여, 주여”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의 고백뿐만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삶의 순종을 보신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했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늘 법정”의 판사라는 내용은 성경에 나온다.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 5:22)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 25:32-33)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태복음 25:34)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성경은 예수님이 심판주(법관, 판사)이시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심판 날에 법적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입술의 시인이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법적 증언임을 기억해야 한다. 거짓된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수 있다. 이제 나는 내 시인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


3. 야고보서 3장 – 혀의 권세와 우리 말의 무게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야고보서 3:6)


혀는 생명을 살릴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우리의 말은 영적인 법적 효력을 가진다. 입술의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입술의 시인은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영적 계약과 같다. 우리는 하늘 법정에서 입술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입술로 시인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증언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4. 믿음으로 시인하는 자는 산도 옮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3-24)


나는 지금까지는 산을 옮기는 믿음을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내 삶의 산은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기도를 통해 해결하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오늘, 나는 깨달았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실제로 나무가 시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즉, 예수님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입술로 시인할 때, 우리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영적 법적 효력을 가지는 증언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시인하는 삶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입술의 시인은 법적 증언이므로, 믿음이 담기면 강력한 권세를 가진다. 그러나 마음에 의심이 있거나, 형식적인 시인이라면 아무런 능력이 없다. 입술의 시인은 영적 계약과 같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시인은 위증죄가 된다. 하나님은 거짓된 시인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진정한 믿음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는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으로 시인해야 한다.


5. 입술로 시인하는 것은 하늘 법정에서 하는 증언이다


로마서 10:10에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늘 법정에서의 증언이다. 야고보서 3장의 혀의 권세를 통해, 우리의 말이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심판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이 있는지를 보신다. 마가복음 11장은 믿음으로 선포하는 자에게 강력한 영적 권세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나는 하늘 법정에서 내 입술의 시인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 거짓된 형식적 신앙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으로 시인하겠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시인이 참된 증언이 되기를 원한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7)


오늘부터 나는 진실하게 신앙 고백하는 것의 무게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하늘 법정에서 믿음의 증언을 하는 자가 되겠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주변에 많은 이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그냥 매주 교회에 다니고 헌금 내고 하면서 평생 살다가 천국가면 되는데 기도를 두 시간 이상 하려고 하고 금식도 정기적으로 하고 날마다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 유별나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입술로 시인하면 된다고 성경에 분명 나오니 그냥 평범하게 믿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고 제 친구도 그렇고 이 말씀은 비유이고 상징으로만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내 삶의 산은 부모님이고 직장 상사이니 그 부분을 기도로 해결한다는 그런 상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이 예수님의 한 마디에 무화과 나무가 시드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는 물론이고 산도 바다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절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오늘 찬송을 부르면서 그 가사의 내용이 내가 법정에서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진지하게 기쁘게 불렀습니다. 내 시인이 하늘 법정에서 위증이 되지 않도록, 거짓된 형식적 신앙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 없는 시인이 아니라, 영적 법적 효력을 가진 참된 증언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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