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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할인간 Mar 15. 2024

나에 대한 고찰

28.  다시 시작되는 봄.

  아침저녁으로 아직은 춥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꽃소식에 마음도 설렌다.

3개월가량의 길었던 방학도 끝이 났다.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온갖 서류와 가정통신문들로 인해 원 없이 이름과 사인을 해본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가 아니라 내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적어 본다.

그래 내게도 이름이 있었지..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수확 물량이 늘어나고 있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안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여름을 어떻게 보내라고 하우스 안 낮 온도는 벌써 30도를 넘어간다.  내 키보다 훌쩍 커버린 고추나무는 숲이 되어버려서 그나마 버틸 수 있다. 환기창을 다 열어 버리기엔 밖의 온도 서늘하다.

너무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 되면 밖으로 나와서 열을 식히고 크게 호흡도 한다. 해녀들이 숨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 반백수 상태가 되었다. 겨울 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 작물이 버텨 내지를 못 했다. 습하면 오는 병충해들이 점령을 해버려서 고추나무는 처참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돈은 돈대로 깨지고 속은 까맣게 탔다.

더 끌고 가기엔 무리다.  과감하게 한 동을 정리해 버렸다.

날씨 탓도 있는 것 같고 토양에서 오는 문제도 있는 것 같다. 토양분석을 맡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땅관리부터 하기로 한다.

8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7월 말까지 해오던 농사를 일찍 접으려니 속이 쓰리다.

아직 한 동은 남아 있지만 썩 좋은 상태는 아니다. 돈 나오올 구멍이 좁아지고 있다.


마트에 가보면 채소가 너무 비싸다며 화를 내시는 분을 종종 보는데 뭐라고 대꾸를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 거린다.  농민들도 물량이 없어서 속이 썩어 가고 있다고 말이다.

기후변화로 농사도 어려워지는 것 같다.


예전에 상추가 비싸서 금상추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고기에 상추를 싸 먹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인당 5장으로 제한하는 고기 무한리필 집도 있을 정도였다.


요즘 농가에 직접 주문하며 저렴할까 하고 전화를 하시는 분들이 많다. 마음은 알겠지만 물량이 없어서 비싸다는 걸 일일이 설명하는 게 참 씁쓸하다. 막무가내로 한 박스만 사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농장에 작물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면서.  분노의 게이지가 상승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는 잘 안 받게 된다.


수확을 앞두고 태풍이 와서 다 떨어진 과일들을 보며 울상이 된 농부를 취재해 방영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 뉴스를 보고 농가에 전화해서 떨어진 과일들을 사겠다는 전화가 세도 했다고 한다.

물론 농가를 돕겠다는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었야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된다.

판매를 하고 있다면 조용히 구입해 주면 된다.  마음도 과수원도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농부는 작물로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번 농사는 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계획을 다시 세우고 여름 작기를 준비해야 한다.  이번엔 여유롭게 여름을 즐겨보고 싶었는데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나의 여름휴가는 이번에도 반납이다. 틈틈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 여름방학은 2주 정도 라고 했다. 겨울에 학교 공사로 인해 여름방학이 짧다고 한다.


반백수가 된 기념으로 구례 화엄사로 나들이도 다녀왔다. 너무 이르게 도착했는지 홍매화가 이제 막 피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절 안까지 들어가 주차를 할 수 있어서 많이 걷지 않아서 좋았다.

늘 서서 일하니 발목이 아팠다. 계단은 가팔랐지만 산세에 압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작되는 2024년의 봄. 새 희망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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