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미니스트의 독백
지난가을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프랑스 출신의 Cindy는 내게 물었다.
"Are you a feminist?"
난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녀는 한국의 페미니즘에 관해 궁금해했다. 특히 내가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페미니즘을 실현하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물었다. 내가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것은 내 영어실력이 모자라서만은 아니었다. 잊고 지내던 주제에 관해 주저 없이 답을 했어도, 그것이 나의 옷이었는지, 나의 살이었는지, 뼈이거나 혹은 영혼의 일부였는지, 그것이 지금 나의 삶에는 어떤 모양의 나이테가 되었는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슴까지 콩닥거리며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진부하지만 현실이었던 아버지의 말. "계집애들은 모두 상 아래에서 밥 먹어!" 비좁은 상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우리 사 남매가 숟가락을 부딪히는 상황에서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밥그릇을 들고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내 눈물에 나만 밥상 위에서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셨지만 난 거부했다. 언니와 여동생, 엄마가 모두 상위에서 먹기 전에는 난 그 허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작은 상을 사 오고서야 평화를 찾게 되었다. 내가 어린 페미니스트로 태어나던 무렵의 일이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시간의 기억이 어디 그뿐이겠나? 생각하기 싫은 일들도 많았다.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가슴을 팔로 가리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일일이 말하기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버스와 거리에서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났다. 그것이 일순간 스친 강한 폭력이고 충격이었다면, 더 길고 강고하기는 결혼 안에서였을 것이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겪어야 했던 일은 보다 체계적이었다. 남편은 평등과 존엄을 추앙하지만 아내와 더불어 실천하는 편은 아니다. 설거지와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된 지 오래다. 그도 직장에서 힘들 테니까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다.
그래서 난 지금 페미니스트인가? 나의 답은 '그렇다'이다. 그럼 난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 답도 그렇다.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은 내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매일 배우고, 밭에서 일하고, 글을 쓴다.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은 페미니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내적 요소이다. 경제적 자립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페미니즘은 내게 진행형인 것이다.
나는 일 년에 몇 달은 연로하신 친정어머니를 돌본다. 친정엄마 자신과 올케가 일 년 중 얼마동안이라도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완전하지 않은 일시적 역할의 분담일 수 있다. 더구나 난 시부모에 대한 책무까지 기꺼이 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페미니즘을 생각하지 않았을 옛 전통 종부가 의무를 떠안았던 것과 뭐가 다를까? 며느리로서 책무는 엄정해도 적어도 그들은 친정에 대한 책무는 면했을 텐데...
난 존엄과 평등을 생각한다. 존엄과 평등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외연은 노고 없이 뻗어나갈 수 없다. 힘들지만 돌봄이 필요한 내 가족에게 기꺼이 나를 투여한다. 생각을 가지런히 견고하게 유지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달리기로 몸을 돌본다. 우리는 모두 밥상 위에서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 난 단지 그것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함께 웃으며 먹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