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첫 소풍을 갔다.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2년을 지내다가 국민학교 입학식 바로 전날 서울로 돌아온 나는 소풍을 앞두고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시골에 살 때는 소풍이란 걸 가본 적도 없거니와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소풍 가는 날 아침 일찍부터 김밥을 말고 이것저것 챙기시는 어머니가 나보다 더 설레셨던 것 같다. 내가 큰 아들이라서 자식의 소풍에 따라나서는 게 처음인 어머니는 소풍 가기 전 날 나들이옷까지 장만하셨다.
어머니는 달걀을 삶고 칠성사이다와 맛난 과자들을 내 작은 배낭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또 동그란 3층 찬합에 김밥을 바라바리 담아 보자기에 싸서 들었다. 화려한 원피스를 입었고 양산으로 한껏 멋을 내셨다. 어머니와 나는 이렇게 생전 처음으로 함께 학교에 갔다.
소풍 장소는 국민학교 1학년이 걷기에는 조금 먼 정릉청수장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숭인국민학교는 한 반에 90여 명이나 되었고 학급 또한 29반이나 되는 콩나물시루 학교였다. 그래서 학생들 등교시간을 3부로 나누어 수업했다. 그 학생들 전원이 미아삼거리에서 하염없이 걸어서 청수장까지 갔으니, 그 상황이 과장되게 표현하면 선두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후발대는 학교운동장을 겨우 나선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 알고 보니 1학년 학생들이 모두 소풍을 온 게 아니었다. 당시 숭인국민학교가 빈민촌 하월곡동에 있었고 아이들 거의 대부분이 하월곡동 아이들이었다. 하월곡동 달동네 아이들은 김밥도 싸올 수가 없어 소풍날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풍 못 온 학생이 절반 이상이 되었다고 나중에 선생님께 들었다.
하월곡동 하월곡시장 젓갈가게 안 구들방에서 살던 우리 식구는 몇 년이 안 돼서 건너편 서울 중산층이 산다는 미아리로 이사했기 때문에 첫 소풍 가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깐깐한 생활력이 빨리 잘 사는 동네로 넘어가 살게 한 것이다.
얼마 전 옛날사진들의 디지털작업을 하면서 나의 첫 소풍 단체사진을 보게 되었다. 전체 인원의 반도 훨씬 안 되는 친구들이 소풍을 간 것을 사진으로 확인했다. 아이들 숫자만큼 어머니들이 따라오셨기 때문에 어머니들을 빼면 그렇게밖에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오전은 출석 체크하고 이동하고 또 인원 체크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난 사실 아침 일찍 어머니가 말고 있던 김밥을 보며 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본 김밥이 그리 맛있어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막상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나는 그 오묘한 맛에 반해버렸다. 김이란 것도 처음 맛 봤지만 계란 지단에 소시지, 어묵 볶음과 시금치 무침에 노란 단무지가 어울린 그 맛이 정말 별미였다.
처음 맛본 사이다는 미지근하고 시원하지도 않은데도 천국의 맛이랄까, 너무나 짜릿했다. 나는 지금도 1학년 때 어머니가 말아준 김밥을 맛본 이후 어머니의 김밥을 지금까지 무지 좋아한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수건 돌리기, 보물찾기 등 흥미진진한 놀이들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정환아, 손 내려!”
어머니가 소리를 치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날 어머니가 내게 처음 사준 장난감 망원경으로 사진사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소풍 가기 전 날의 설레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처음으로 싸준 김밥과 사이다와 장난감 망원경….
이것이 어머니가 따라온 마지막 소풍이 되었다. 1학년 가을소풍부터는 어머니 대신 서울 올라온 넷째 고모가 소풍을 따라왔다. 봄소풍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맞벌이로 일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봄나들이는 그날 하루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