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논어》를 읽으며
안식년 22일 차. 나는 안식년을 통해 지난 8년의 삶을 지탱해 온 나의 거대한 믿음 하나를 논박하였다.
"실력이 있으면, 사람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 오만하고도 순진했던 생각은 안식년의 적막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기술은 강력한 무기였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석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프로젝트는 성공했으나 내 곁엔 '내 편'이라 부를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낡은 믿음이 사라진 마음의 밭은 텅 비어버렸다. '실력 지상주의'가 떠난 자리에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이제 무엇으로 앞으로의 삶을 채워야 한단 말인가?
허전한 마음으로 서가를 서성이다가, 2,500년 묵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亂世)를 떠돌며 실패를 거듭했던 고뇌하는 인간. 공자의 《논어》였다. 나는 이 낡은 텍스트를 나의 텅 빈 마음에 심을 새로운 씨앗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흔히 공자를 고리타분한 도덕 선생님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읽은 공자는 놀랍게도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리더였다.
사람들이 공자에게 "당신은 아는 게 많은데 왜 딱히 내세울 만한 '전문가 타이틀'이 없느냐"고 비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할까? 활 쏘는 일을 할까, 말 모는 일을 할까? 나는 말 모는 일(御)을 하겠다."
당시 활쏘기가 과녁을 맞혀 승패를 가르는 '경쟁의 기술'이었다면, 말몰이는 말을 달래고 수레를 안전하게 이끄는 '운용의 기술'이자 가장 낮은 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공자는 남을 이기는 활쏘기 대신, 묵묵히 수레를 끄는 마부의 길을 택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대목을 읽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8년, 나는 누구보다 채찍을 세게 휘두르는 유능한 마부였다. 납땜 연기를 마시고 밤새 코드를 짜며, 내 마차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것이 내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공자의 '말몰이'는 나와 달랐다. 나의 말몰이가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면, 공자의 말몰이는 수레에 탄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빨리 달리는 기술에만 취해, 정작 내 뒷자리에 태워야 할 동료들을 잊고 있었다. 승객 없이 홀로 질주하는 마차. 그것은 폭주하는 기계일 뿐, 리더의 수레가 아니었다.
나는 효율성 신봉자였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나 잡담을 시간 낭비로 치부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타고난 기질 자체가 그렇다. 내가 꽂힌 문제에는 무섭게 몰입하지만, 흥미 없는 관계 맺기에는 견디기 힘들 만큼의 지루함을 느낀다. (ADHD 성향이기도 하다.)
그동안은 이걸 '열정'이나 '성과주의'로 포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 그릇의 구멍이었다.
공자는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투자의 현인 찰리 멍거와 소크라테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무엇을 못 하는지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기술은 알지만, 사람은 모른다. 나는 경청이 힘들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 눈이 어둡다. 그래서 나는 ADHD 치료를 위해 병원을 예약했다. 공자가 "일을 잘하려는 장인은 먼저 도구를 갈아야 한다"고 했듯, 이건 나라는 사람을 수리하고 다듬는 과정이다.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노력이다.
논어를 읽다 등골이 서늘해진 문장이 있다.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인생은 끝난 것이다."
이 말은 저주처럼 들렸다. 마흔 살. 불혹. 그때가 되면 사람의 성격은 굳은 찰흙처럼 되어서 더 이상 모양을 바꿀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 거울을 봤다. 나는 서른다섯이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직 내 찰흙은 굳지 않았다. 나에게는 5년이라는 '골든타임'이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멈추기로 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던 질주를 멈추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도 느슨하게 풀어줄 줄 아는 삶의 리듬을 배우기로 했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나는 마흔이 되었을 때 실력은 좋지만 누구도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 되어 있을 테니까.
공자가 말한 '군자'가 되고 싶다며 책을 덮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확신은 없다.
'실력' 대신 '인(仁)'과 '덕(德)'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좇는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는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쩌면 이 실험은 또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난 8년의 방식(실력 지상주의)으로는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정답을 맞히려는 강박을 버리고, 그저
이 방향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믿음 하나를 쥐고 방향키를 돌려보려 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연습. 내가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묻는 용기. 그리고 일보다 사람을 먼저 들여다보려는 시선.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서툰 걸음마를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모르는 길 위에서 매일 조금씩 나를 고쳐 쓰는 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