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으며
대한민국은 지금 거대한 '정체성 앓이' 중이다. 10대 수험생부터 60대 은퇴 직장인까지, 모두가 똑같은 질문을 안고 잠자리에 든다. "내 적성은 뭐지?", "나는 무엇을 해야 성공할까?", "이 길이 맞나?"
우리는 흔히 서구권이 우리보다 훨씬 더 능력주의적이고 열려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신분'이 존재한다. 배관공의 아들이 배관공이 되고, 제빵사의 딸이 빵을 굽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다. 그들에게는 대를 이어온 가업이 주는 안정감이 있고, 굳이 남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닫힌 사회' 특유의 평온함이 남아 있다.
반면 한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그 모든 계급의 사다리를 박살 냈다. 우리는 완전무결한 '능력주의'의 탑을 세웠다. 누구든 수능을 잘 보면 의사가 될 수 있고, 노력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것을 '열린 사회'라 부르며 환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꿈꾸던 자유를 얻었는데, 왜 우리는 더 행복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스스로를 착취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밤을 보내고 있는가? 이 기이한 역설을 풀기 위해, 나는 오늘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과 칼 포퍼, 그리고 현대의 유발 하라리를 한 테이블에 불러내려 한다.
서양 철학의 시조인 플라톤은 사실 고대의 스티브 잡스였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어제의 왕이 오늘의 노예가 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중우정치가 판을 치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변하는" 시대였다. 플라톤은 이 변화가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세계'를 설계했다. 바로 '이데아(Idea)'다. 그가 쓴 《국가》는 오늘날 애플(Apple)의 폐쇄적인 생태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시인은 추방한다(검열). 교육은 국가가 통제한다(OS 독점). 각자는 정해진 위치에서 일할 때 가장 행복하다(사용자 편의성)."
잡스가 "외부 앱은 위험하니 우리가 통제하겠다. 대신 너희는 쾌적함을 누려라"라고 했듯, 플라톤은 "자유는 혼란을 낳으니 철인왕이 통제하겠다. 대신 너희에게 완벽한 정의를 주겠다"라고 선언했다. 우리는 가끔 복잡하고 버벅대는 안드로이드(자유 민주주의)보다, 나를 통제하지만 '그냥 잘 작동하는' 아이폰(독재)을 그리워한다. 플라톤의 망령은 그렇게 매력적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안한 '질문'보다 견고한 '대답'을 원한다. 그래서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후계자들에 의해 편집된다.
플라톤은 평생 "나는 모른다"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을 모아 거대한 철학 '체계'를 세웠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외치던 혁명가 예수의 가르침은, 바울을 거치며 정교한 '교리'와 '신학 시스템'으로 재건축되었다.
요한복음이 예수를 헬라 철학의 '로고스(Logos, 이성)'라 칭한 것은 천재적인 전략이었다. 뜨거운 혁명의 에너지를 차가운 우주의 원리로 치환함으로써, 불안한 대중에게 "이것이 세상의 정답이다"라는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 나 대신 정답을 내려주고, 내 인생을 시스템 안에 안착시켜 주길 바란다. 그것이 '닫힌 사회'가 주는 달콤한 안정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했다. 수렵채집 시절, 인류는 하루 4시간만 일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식량(풍요)을 얻은 대신, 허리가 휘어지는 노동과 디스크, 미래에 대한 걱정을 떠안았다.
나는 이 비극이 현대의 '열린 사회'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분제 타파(자유)를 얻는 대신, '무한 경쟁'과 '존재론적 불안'을 얻었다. 과거의 농노는 가난해도 억울할 뿐 자책하진 않았다. "이건 내 탓이 아니라 신분 탓이야."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는 온전히 '나의 무능' 탓이 된다.
"기회는 평등했고 과정은 공정했다. 그런데 넌 실패했다. 그러니 넌 패배자다."
이 잔인한 속삭임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몬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단순한 빈곤의 문제가 아니다. 급격하게 열린 사회가 개인에게 던지는 '문명의 중압'이자,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Anomie)'의 비명이다.
우리는 행복을 팔아 자유를 샀다. 농부가 다시 수렵채집으로 돌아갈 수 없듯, 이성을 깨우친 우리는 다시 부족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덫에 걸렸다.
글을 마치며 그럴듯한 희망이나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낀다. "그러니 우리 함께 연대하자"거나 "내면의 힘을 기르자" 같은 멋진 말들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닫힌 사회의 안락함으로 돌아가기엔 우리 머리가 너무 커버렸고, 이 무한 경쟁의 열린 사회를 맨 정신으로 견디기엔 우리 마음이 너무 약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진퇴양난의 '덫'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섣부른 해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그저 나의 당혹감을 고백하는 것뿐이다.
플라톤처럼 완벽한 세상을 설계할 능력도 없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세상을 저주할 배짱도 없다. 그저 "내 재능이 뭐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 앞에서 매일 흔들리는, 수많은 불안한 현대인 중 한 명일 뿐이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소크라테스조차 평생토록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혼란과 막막함은, 잘못 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우리가 깨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불안하지만, 바로 그 '모름' 때문에 우리는 계속 고민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답을 찾아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알기 위해서.
이 거대한 불안의 시대, 당신이나 나나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 부디, 이 모르는 길 위에서 서로 너무 외롭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