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인드 부부':상처를 부검해야하는 이유

상처를 빨리 치료하기 위해선 힘들지만 부검해야한다.

by 고도

보는 내내 숨이 막혔다.

얼마 전 우연히 시청한 TV 프로그램 <이혼숙려캠프>에는 일명 ‘리와인드(Rewind) 부부’가 등장했다. 남편은 5년 전 아내의 실수를 매일같이 되감기 하며, 그 기억을 현재로 끌고 와 자신과 아내를 불행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면 속 그를 보며 손가락질했다. “소시오패스다”, “가스라이팅이다”, “나르시시스트다”... 각종 심리학 용어들이 그를 단죄하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핏대를 세우며 과거를 따져 묻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찰리 멍거(Charlie Munger)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배우라.”

나는 그 숨 막히는 '리와인드' 지옥에서, 역설적이게도 나를 치유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상대를 괴롭힌 그의 행동은 분명 극단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모습이 우리와 완전히 무관한 타인의 이야기일까? 정도의 차이만 걷어내면, 우리 안에도 똑같은 '리와인드 버튼'이 존재한다.

샤워를 하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 속 상대의 무례함에 치를 떨거나, 이불 속에서 몇 년 전의 실수를 되감기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 그는 그 지옥을 파트너에게 쏟아냈을 뿐이고,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에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를 ‘괴물’이라 부르고 외면하면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비난으로 끝낸다면 멍거가 말한 ‘배움’의 기회는 사라진다. 나는 그를 나의 반면교사로 삼아, 내 안의 시스템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시간은 너무 비싼 치료제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입으면 “시간이 약”이라며 덮어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풍화되고 상처는 흐릿해지니까. 하지만 자연 치유에만 의존하는 것은 극도로 비효율적인 전략이다.

심리학에는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것이 있다.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사건을 계속해서 반추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뇌 속에서 ‘현재 진행형’의 과제로 남아 끊임없이 바늘로 찌르듯 고통을 준다. 리와인드 남편이 5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꺼내는 것도, 내 머릿속에서 이불킥할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뇌의 입장에서는 아직 그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며 1년, 10년을 욱신거리는 가슴으로 사는 것. 그것은 인생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고통에 낭비하는 일이다.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찢어진 상처를 방치하면 덧나고 흉터만 크게 남는다. 그래서 나는 마냥 시간에 맡기는 수동적 태도 대신, 뇌에게 '종결' 신호를 주기 위한 적극적인 외과 수술을 집도하기로 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복기(復棋)가 아니라 부검(Post-mortem)이라 부르고 싶다. 복기가 ‘다시(復) 바둑(棋)을 둔다’는 뜻처럼 이미 끝난 판을 단순히 되감기 하는 것이라면, 부검은 망쳐버린 과거의 사인(死因)을 밝혀내기 위해 메스를 대는 과정이다.

안식년을 맞아, 나는 나를 괴롭히던 최근의 조직 내 갈등을 수술대 위에 올렸다. 기억을 해부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손에는 땀이 쥐어졌고, 심박수가 빨라졌으며, 당시의 분노와 짜증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과정이 기계처럼 냉정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괴롭고 힘들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팩트와 감정을 분리하며 원인을 규명하자, 신기하게도 들끓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교훈을 추출한 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봉합을 선언했다.

“이제 됐다.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배웠다. 이제 그만 덮자.”

신기하게도 봉합을 마치자 그 기억을 할때면 날카로운 송곳 같이 찌르던 통증이 뭉툭한 감각으로 변했다. 100% 개운한 것은 아니지만, 예리한 상처가 만지면 조금 거칠 뿐인 흉터로 바뀐 것 같았다. 흉터는 더 이상 찌르듯 아프는 않다.


타인도 기계가 아니라 ‘생태계’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는 왜 타인에게 상처받고 분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단일한 자아'로 생각하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나는 “나는 기계가 아니라 생태계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스스로를 하나의 단일한 자아로 규정하려 할 때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수많은 욕망과 가설들이 충돌하고 적응하는 ‘복잡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나의 모순된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생태계라면, 타인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타인에게 ‘정의’와 ‘일관성’을 기대한다. “내가 선의를 베풀었으니 너도 존중을 보여야지.” 하지만 이것은 복잡계에 대한 모델링 오류다. 타인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역시 그날의 컨디션, 열등감, 생존 본능, 환경 변수에 따라 끊임없이 요동치는 유동적인 생태계일 뿐이다.

그가 나를 배신하거나 무례하게 군 것은, 그가 악당이라서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척박한 자신의 내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존 반응이었을지 모른다. 나도 내 맘을 모르는데, 남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오만 아닐까.


관계의 갈등은 ‘자연재해’다

타인을 도덕적 심판의 대상이 아닌, 자연재해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태풍이 불어 지붕이 날아가거나,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졌을 때 우리는 하늘을 향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며 배신감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저 “비가 오는구나”, “땅이 흔들리는구나”라고 현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너진 곳을 치우고, 다음을 위해 더 튼튼한 내진 설계를 고민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무례한 동료, 말이 통하지 않는 상사, 예기치 못한 배신... 이것들은 내 인생에 닥친 악의적인 공격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복잡계가 충돌하며 빚어진 필연적인 자연재해에 가깝다. 상대를 ‘나쁜 놈’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기상 현상’으로 인식하는 순간, 원망과 분노라는 감정의 소모전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자연재해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대비하고, 겪어내고, 복구할 뿐이다.


흉터를 훈장 삼아

‘리와인드 남편’의 실수는 과거를 기억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뇌기만 할 뿐, 그 상처를 제대로 부검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원망하고 분노했을 뿐,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화나게 하는지 그 원인을 본인 안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진정한 치유는 타인의 실수나 악의적인 행동을 먼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이것은 상대를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고 현실을 직시하고, 다음에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를 성장시킬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제 과거의 실수가 떠올라도 무작정 회피하거나 태연한 척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것은 여전히 두렵고 피하고 싶은 과정이다. 매번 메스를 드는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나조차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알고 있다. 마치 죽도록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라도 하고 나면 오히려 몸이 개운해지듯, 고통스러운 부검과 봉합을 마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그 개운함을 알기에, 나는 다시 수술대 앞에 설 것이다.

내 마음에 남은 흉터들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 수많은 자연재해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더 튼튼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훈장이다.

인생은 짧다. 타인의 실패에서 배우고, 나의 상처는 힘들더라도 봉합하자. 그렇게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와, 온전한 ‘현재’를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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