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회사의 인정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찰리 멍거와 함께 내 마음의 보상 구조 다시 짓기

by 고도

성장의 진짜 정의

"애지중지하던 아이디어를 박살 내지 않고 보낸 해는 시간을 낭비한 해다."

찰리 멍거의 이 문장은 잔인하다. 그래서 좋다. 좋은 문장은 대개 내 변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칼 포퍼의 철학, '추측과 논박'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지식은 "맞았다"는 칭찬이 아니라, "틀렸다"는 논박을 통해 자란다. 그러니 성장의 그래프는 상승 곡선이 아니라, 깨진 파편들의 누적이다. 과감한 추측이 있고, 현실이 그 추측을 시험하고, 추측이 부서질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통의 폐허 위에서 비로소 더 나은 가설이 나온다.

나는 2025년을 보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을 박살 냈는가?" 다행히 하나는 확실히 박살 냈다. 바로 '회사'에 대한 나의 오래된 관념이다.


낡은 가설: "노력하면 인정받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무의식중에 이런 공식을 신뢰하고 있었다.

"내가 고통을 감내하며 탁월한 성과를 내면, 회사와 동료들은 그에 합당한 인정과 보상을 줄 것이다."

나는 창업자처럼 일했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나는 '한계'를 상수로 두지 않았다. 아무리 주인의식을 가져도 회사는 내 것이 아니며, 타인의 인정은 내 통제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이 가설의 보상 구조는 너무나 취약(Fragile)했다.

인정이 오면 → 이득

인정이 없으면 → 손실 (좌절, 분노)

이 구조로 살면, 내 평온은 늘 외부에 담보로 잡힌다. 타인의 표정 하나에 내 하루가 출렁인다. 이것은 주식 투자로 치면 현금 없이 '풀베팅'한 것과 같다. 오를 때만 행복하고, 떨어지면 지옥이다. 나는 이 가설을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더 망가진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분노의 재해석: 에픽테토스와 멍거의 가르침

기대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마다 나는 괴로웠고, 그 괴로움은 분노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분노는 "회사가 나쁘다"는 신호가 아니라, "내 가설이 틀렸다"는 신호였다.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는 "권한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라"고 했다. 내 노력은 내 권한이다. 하지만 타인의 평판과 보상은 내 권한 밖이다. 내 권한 밖의 것을 보상으로 걸어두면 필연적으로 불행해진다.

찰리 멍거는 백내장 수술로 한쪽 눈을 잃었을 때 신세 한탄 대신 "점자를 배울 기회"라고 말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보상 구조를 바꾸는 것. 손실이 와도 이득을 얻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것이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핵심이다.


새로운 가설: "회사는 나의 테스트베드다"

그래서 나는 가설을 수정했다. 반증은 이미 끝났으므로, 폐기된 자리에는 더 단단한 새 가설이 필요하다.

(구) 가설: 회사는 나를 인정해 줘야 하는 곳이다.
(신) 가설: 회사는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수 있는 '테스트베드(Testbed)'다.

이 새로운 가설의 장점은 단순하다. 내가 잃지 않는 구조(Win-Win)라는 점이다.

인정이 오면? 좋다. (보너스)

인정이 안 와도? 상관없다. 나는 '실험 데이터'를 얻었으니까.

이 구조에서는 출근이 "평가받으러 가는 일"이 아니라 "시험하러 가는 일"이 된다. 상사의 피드백은 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실험 결과에 대한 변수 조정값이 된다. 나는 이제 '인정받아야 하는 회사원'이 아니라, '회사라는 실험실에 출근하는 연구자'로 살 수 있다.


폐허 위에서 시작되는 성장

결국 결론은 명확하다. 나는 더 이상 "인정"을 목표로 살지 않겠다. 그건 내 권한 밖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시험"을 목표로 살겠다. 그건 내 권한 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년 하나씩, 내가 가장 아끼던 가설을 박살 내겠다. 애지중지한 가설을 오래 붙잡을수록 고통은 길어진다. 성장은 대개, 내가 가장 아끼던 아이디어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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