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을 위한 수학적 변명
대부분은 기계적인 중간, 혹은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를 떠올리곤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삼프로TV에서 "중용은 가만히 가운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무게 중심을 잡듯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훌륭한 통찰이지만, 나는 조금 더 명확하고 현대적인 언어로 이 개념을 다시 정의해보고 싶다.
나에게 중용을 묻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비선형 함수(Non-linear function)다."
우리는 흔히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믿는다. 돈이 많을수록, 외모가 예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세상을 '선형 함수(직선)'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투입량이 늘어나면 결과값도 비례해서 무한히 늘어날 것이라는 착각.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 관찰한 세상의 그래프는 결코 직선이 아니었다.
자산의 규모를 예로 들어보자. 최근 우리 사회는 "돈은 많을수록 무조건 좋다"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돈과 행복의 관계는 전형적인 비선형 곡선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적절한 자산의 규모는 금융자산 기준 3억에서 30억 사이다. 물론 큰돈이다. 하지만 이 구간은 우리에게 자유와 선택권을 주되, 삶을 흥청망청 탕진하기엔 부족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해 준다. 만족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른바 '효용의 구간'이다.
문제는 그 임계점을 넘었을 때다. 가령 자산이 100억을 넘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단순히 통장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기대감'이라는 변수가 함께 폭증한다. 친척이나 지인의 도움 요청, 그리고 거절했을 때 돌아오는 실망의 눈초리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고차 방정식이 된다.
신혼여행 선물 고르기를 떠올려보면 쉽다. 누구에게, 얼마짜리 선물을 줄 것인가? A에게 선물을 주기로 예외를 두는 순간, "왜 B는 안 챙겨줘?"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선택의 자유가 오히려 관계의 감옥을 만드는 역설이다. 부자에게는 늘 이런 딜레마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래서 나는 "도와주고 싶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통하는 삶을 사랑한다. 나에게도 떳떳하고 상대에게도 미안하지 않은, 딱 그만큼의 여유. 돈의 효용 곡선이 정점을 찍고 하강하기 직전, 그 어딘가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유함이 아닐까.
이 비선형의 법칙은 외모에도 적용된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이들은 어딜 가나 주목받지만, 그만큼 피곤한 시선과 구설수를 견뎌야 한다. 물론 외모가 경쟁력인 시대에 자신을 가꾸는 것은 중요하다. 적당한 꾸밈이나 가벼운 시술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기울기를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귀납적 오류'에 빠진다. 한 두 번 수술한 이후에 만족감이 매우 높은 것이다.
처음 수술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던 사람은 그 구간이 '직선화된 구간', 즉 투입 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구간이었음을 깨닫지 못한다. 앞으로도 계속 비례해서 예뻐질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수술대에 계속 눕는다.
결국 그래프는 꺾인다. 과도함은 부자연스러움을 낳고, 미적 수준은 오히려 급격히 하락한다.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지난 후에야 우리는 깨닫는다. 아름다움 역시 무한히 뻗어가는 직선이 아니라, 정점을 지나면 곤두박질치는 곡선이었음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우면 데이고, 너무 멀면 춥다. 우리는 늘 적당한 거리를 찾아 헤매는 고슴도치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험(귀납)에 의존해 세상을 이해한다. 무언가를 더 투입했을 때 결과가 좋으면, 계속 더 투입하려 한다. 그것이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중간을 지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내 인생의 그래프가 어디서 꺾이는지를 아는 수학적 감각이다. 효용이 극대화되는 정점(Peak)을 인지하고, 욕심이 그 선을 넘어 곡선을 끌어내리기 전에 멈추는 것.
모든 것은 비선형 함수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그 '최적의 값(Optimization)'을 찾아내는 과정.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대적인 중용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