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우의 피라미드는 틀렸다
딱히 무슨 일이 터진 것도 아니다. 그냥 현대인의 고질병 같은 거다. 멈춰 있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그런데 커피를 한 잔 내려 창가에 앉아 햇빛을 받자, 기분이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망막에 쏟아지는 강렬한 빛, 혈관을 도는 카페인. 그 단순한 생화학적 작용이 뇌에서 세로토닌을 만들어냈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정설처럼 믿어온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가 틀린 가설일 수도 있겠다고.
교과서에서는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가르친다. 생존과 안전이 해결되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인류가 만들어낸 거대한 '심심풀이'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발전하며 잉여 생산이 늘어나자,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진 일부 사람들은 '무료함'이라는 새로운 공포와 마주했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홀로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 그래서 인류는 그 권태를 해결하기 위해 '자아실현'이라는 허상을 꼭대기에 세운 게 아닐까? 심심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위기 상황을 만들고, 경쟁하고, 고뇌하는 척하는 '고급 놀이' 말이다.
역사상 그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본 사람들,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를 보자. 그들의 삶은 철저히 도파민(Dopamine)에 이끌린 삶이었다. 정복하고, 빼앗고, 성취하는 삶. 하지만 그 끝은 어땠나?
징기스칸은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몽골식 천막)에서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알렉산더 역시 빈손을 관 밖으로 내놓게 했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했던 곳은 화려한 궁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마지막 순간 간절히 원했던 건, 내가 오늘 아침 누린 이 햇살, 안전함,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도파민의 추구가 아니라, 세로토닌(Serotonin)을 누리는 삶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우울하거나 답답하면 비싼 돈을 들여 여행을 간다. 여행이 주는 행복의 실체는 뭘까? 나는 그게 단순히 '일조량' 때문이라고 본다. 실내의 형광등 불빛은 기껏해야 500 룩스다. 뇌 입장에서는 어두운 동굴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맑은 날 야외의 태양 빛은 10만 룩스가 넘는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아, 행복하다"라고 느끼는 건, 하와이나 파리라는 장소 때문이 아니라, 뇌가 오랜만에 빛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인은 그 비싼 항공권을 결제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값인 '햇빛'과 '걷기'를 사러 가는 셈이다.
나는 올해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는걸 점점 깨닫는다. 가만히 있으면 또 무언가 하려는 본능이 꿈틀대고, 불안해진다. 하지만 오늘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깨달았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비싼 재화는 명품 가방이나 스포츠카가 아니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행복은 무언가를 더해서가 아니라, 불행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달성된다. 작위적이지 않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나는 오늘 분주하지 않음을, 그리고 공짜로 주어지는 이 아침의 햇살을 매우 사랑스럽게 여겼다.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피라미드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이 여유. 이것이야말로 징기스칸이 그토록 꿈꿨던 삶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