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멍거의 지혜로 재활하기
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을 내며 배틀넷을 즐겼다. 스팀(Steam) 게임을 탐험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번아웃 이후로는 게임 화면을 보는 것조차 피곤하다. 최근에 스팀 라이브러리를 둘러보며 뭐라도 해볼까 했지만, 도무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에서 역한 기분마저 올라왔다. 흔히 말하는 게임 불감증이다.
인터넷을 보니 나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가만 보면 이건 결국 도파민(Dopamine)의 문제다.
게임이 주는 도파민이 있고, 리얼 월드(직장, 투자)가 주는 도파민이 있다. 사실 직장 생활에서 연구 개발이나 프로젝트가 잘 풀릴 때, 혹은 주식 투자가 대박이 났을 때 나오는 도파민은 게임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현실의 성취가 주는 고자극 맛을 봐버린 뇌에게, 모니터 속 가상 세계의 보상은 너무나 미미하고 시시한 수준인 것이다.
그러니 심리적으로 번아웃이 왔다는 건, 직장 생활이나 주식 투자가 주는 그 강력한 도파민조차 이제는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너지가 고갈됐다는 뜻이다. 가장 자극적인 것조차 귀찮은 마당에, 밍밍한 게임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로감을 느낀다. '이 방대한 스토리와 시스템을 언제 다 익히지?', '어떤 전략이 효율적이지?' 게임을 즐기던 시절에는 접속하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설렘이었는데, 이제는 주객이 전도됐다. 게임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이겨야만 하고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린다.
이것은 마치 공을 던져야 하는데 손끝에서 공이 떨어지지 않는 투수의 '입스(Yips)' 증상과 같다. 무엇이든 시작하기가 싫다. 게임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 여행을 가는 것, 회사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그 모든 순간에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멈춰 세운다.
이 증상의 치료법은 역설적이게도 지겨울 만큼 심심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지 않을까 싶다. 뇌가 충분히 심심해져서, 그 고자극의 기억들이 희미해질 때쯤이면 다시 게임이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안식년을 통해 반드시 체득해야 할 마인드셋이 하나 있다. 내가 존경하는 투자자 찰리 멍거의 말이다.
"천재가 되려 하지 말고, 바보가 되지 않기를 힘써라."
나는 그동안 직장에서든, 투자에서든, 심지어 노는 게임에서조차 천재가 되려고, 탁월해지려고 애썼다. 그 압박이 나를 입스에 빠뜨렸다.
이제는 반대로 가야 한다. 안식년이 끝나고 복귀했을 때, 탁월하고 빛나는 회사원이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저 '최악의 바보 같은 행동'들을 정의하고, 그것만 피하면 된다. 바보같은 행동을 모두 피하기만 해도 중간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오랜기간 반복하면 복리의 효과로 오히려 탁월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구축하고자 하는 '지속 가능한 삶'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잘하려 하지 말자. 그냥 좀 못해도 되고, 공략을 몰라도 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 '잘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나는 다시 스타크래프트를, 혹은 스팀의 낯선 세계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