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웃에게 시가총액을 가르치려 했나

선지자의 가면을 벗고, 합리주의자의 옷을 입다

by 고도

이웃집 그녀는 우리 부부보다 다섯 살이 어리다.

분양받은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때 알게 된 그녀는 아이도 우리 아이와 나이가 비슷하고, 공통점도 많아 아내와 금세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가끔 우리 집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다 보면,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재테크로 흐르곤 한다.

문제는 그녀의 주식 투자 방식이었다. 그녀의 포트폴리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목록)는 소위 ‘동전주’와 ‘개잡주’로 가득했다. 상장폐지 직전의 종목들이 즐비했고, 매수 이유를 물으면 “그냥 급등주라 샀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이게 500원짜리라 싼 게 아니라니까요. 시가총액을 봐야죠.”

그녀는 시가총액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다. 주식 1주의 가격이 낮으면 그저 싸다고 믿는 순진무구함.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이었다. 이 무지한 어린 양을 올바른 투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구.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시가총액이 무엇인지, 주식회사란 무엇인지, 왜 500원짜리 주식이 삼성전자보다 비쌀 수 있는지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나는 조금 신경쓰이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논리적이었고, 합리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옳았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를 하는데 이정도는 알아야 하는거잖아!" 이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며칠 전, 칼 포퍼의 책을 다시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오만한 선지자였다

안식년을 맞아 나는 칼 포퍼의 책들을 여러권 읽었다. 그 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에서 나는 뼈아픈 문장을 마주했다. 포퍼는 자신을 합리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라고 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는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설득보다는 상대방을 지적으로 자극하기를 유도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가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근거를 들어 반박 불가능한 의견을 내놓는 것, 그것이 합리성이라 믿었다. 하지만 포퍼가 정의하는 합리주의자는 정반대였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이 논의가 끝났을 때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전보다 더 명료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자.”


나의 지난 대화들을 복기해 보았다. 나는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선지자(Prophet)’였다. “내 말이 진리이니 너희는 들으라”고 외치는 오만한 선지자. 이웃에게 시가총액을 설명하던 나의 태도는 상대의 지적 독립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저 나의 지식을 과시하고, 정답을 주입하려는 폭력에 가까웠다.


나는 마치 아메바처럼 행동해왔다

사실 이런 태도는 주식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AI 논쟁을 보면서도 나는 비슷한 오류를 범했다.

누군가 “AI는 자아가 없다”고 주장하면, 나는 짐짓 장난기 어린 마음으로 “인간의 자아는 확실한가?”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처음에는 가벼운 지적 유희로 시작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며 재반박을 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장난은 순식간에 전쟁이 된다. 나는 내 주장에 과도하게 몰입하기 시작한다. 내 논리가 깨지는 것을 마치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며,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더 날카로운 단어들을 찾아낸다.

포퍼는 말했다. 아메바와 인간의 차이는 하나뿐이라고. 아메바는 오류를 범하면 죽지만, 인간은 ‘가설’을 만들어 자신 대신 죽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진화하고 성장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는 내 가설을 나 자신과 동일시했다. 내 의견이 반박당할 때, 나는 내 가설을 기꺼이 죽이고 성장하는 대신, 가설을 살리기 위해 좀비처럼 싸웠다. 시가총액을 모르던 이웃보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더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던 셈이다.


나는 선지자의 가면을 벗을 수 있을까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날의 티타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칼 포퍼의 조언대로 ‘선지자’의 가면을 벗고 대화하고 싶다.

“이거 500원이라 싸지 않아요?”라고 묻는 그녀에게, 틀린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피자 좋아하세요? 피자를 4조각 낸 것과 100조각 낸 것 중, 한 조각 가격이 싸다고 피자 한 판이 싼 건 아니잖아요. 이 회사는 왜 이렇게 조각을 많이 냈을까요?”

정답을 쥐여주는 대신, 질문을 던져 그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지적 독립성을 존중하는 길이고, 어쩌면 나 또한 그녀의 엉뚱한 대답에서 새로운 투자 아이디어를 얻을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막 안식년이라는 긴 호흡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이 시간 동안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박할 때, 방패부터 들어 올리는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더 들려주시겠어요?”

그때 비로소 나는 선지자가 아닌, 진짜 합리주의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실험 로그

- 오늘의 실패(관찰): 상대를 설득하려다 상대의 표정이 흐려짐

- 내 가설(기존): 내가 옳은 설명을 하면 상대는 따라온다

- 내 가설(수정): 설명보다 질문이 상대의 사고를 움직인다

- 다음 대화 규칙: 설명을 시작하기 전, 질문을 2개 먼저 던지기(비유 1개 포함)

- 성공 기준: 상대가 "그럼 이건 왜 그래요?"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기

이전 23화'나 다운 글'을 쓰는 가장 확실한 방법